간호법, 간호계 오랜 요구 끝에 발의됐지만…대통령 거부권으로 앞길 ‘불투명’
전국 간호학과 교수·학생·교직원 거센 반발…광화문 규탄대회 등 단체행동 개시
취직 후 1년 이내 퇴직하는 간호사 47.7%…간호법으로 간호사 처우 개선 시급
실습 인프라 열악, 취직 후 직무 교육자 부족, 간호 업무 외 지시사항 등 해소해야

지난 19일 전국 간호사, 간호대학생이 광화문에 모여 간호법 제정을 촉구했다. (사진=대한간호협회)
지난 19일 전국 간호사, 간호대학생이 광화문에 모여 간호법 제정을 촉구했다. (사진=대한간호협회)

[한국대학신문 우지수 기자] 미래 간호인력인 간호대학 대학생들이 느끼는 교육현장과 실무환경의 괴리감을 줄이고 신규 간호사들의 높은 퇴직률을 해소하기 위해 간호법 제정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간호계의 목소리가 나왔다. 간호계는 간호사의 처우를 개선하고 우수한 간호사를 양성하는 데 목적을 둔 간호법이 제정되지 않는 것은 시대 흐름에 역행하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22일 간호계에 따르면 간호법 제정에 대한 전국 간호인의 요구가 절정에 달했다. 대한간호협회를 비롯한 전국 간호대학 교수, 학생들은 19일 ‘간호법 거부권 규탄 및 부패정치 척결을 위한 범국민 규탄대회’를 서울 광화문에서 개최하는 등 단체행동에 나섰다. 간호협회는 정부 결정에 저항하며 간호사 면허증 반납, 2024년 총선 심판 운동도 벌이기로 했다.

간호법은 1970년부터 꾸준히 제정 필요성이 제기돼 온 간호계의 숙원사업이다. 간호법은 기존 의료법의 하위 항목으로 다뤄지던 간호사를 다루는 법률을 따로 떼어내 간호사의 지역사회 역할, 업무 정의, 처우 개선, 교육환경 최적화 등을 명시하는 법안이다. 이번 윤석열 정부 출범 당시 간호사에 대한 처우 개선을 약속하며 간호법 제정이 가시화될 것이라는 간호계의 기대가 컸지만 최근 간호법 제정 찬반 여론이 부딪히며 의료계에서 갈등이 빚어졌다. 2021년 3월 여야 모두가 발의했고 2년여에 걸쳐 논의된 후 지난 4월 27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지만, 지난 16일 윤석열 정부가 간호법 제정에 재의요구권(거부권)을 행사한 이후 간호계의 반발이 더욱 거세졌다.

간호법에서는 빨라지는 고령화에 따른 지역 노인 진료 수요 증가에 대응키 위해 간호사가 병원에 갈 수 없는 환자들을 간호하는 업무를 할 수 있도록 근거 규정을 마련했다. 간호계를 제외한 의료계는 이 법이 통과되면 의사 없이 간호사가 독단으로 의료 업무를 수행할 우려가 있다며 반대했다. 간호조무사나 응급구조사 단체도 업무와 정체성이 침해될 수 있다며 반대하고 있다.

■ 신임 간호사 47.7%, 취업 1년 이내 퇴직…간호법으로 간호사 처우 개선해야 미래 간호인력 확보할 수 있어 = 대학가는 전국적으로 간호학과 릴레이 성명을 이어가는 등 간호교육의 최전방에서 간호법 제정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간호과학회 교수들을 시작으로 마산대, 충북보건과학대, 용인예술과학대를 비롯한 전국 간호학과소속 교수·학생·교직원들이 간호법 제정 지지를 선언했다. 교수들은 간호법의 골자인 간호사의 처우 개선이 현재 근무하는 간호사들을 위해서도 꼭 필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앞으로 새롭게 의료현장에 뛰어들게 될 예비 간호사들이 제대로 된 간호교육을 받고 시대 흐름에 맞는 근무환경을 만들기 위해 제정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간호사를 희망하는 학생들은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정부는 올해도 일반대 385명, 전문대 315명만큼 간호대학 정원을 늘렸다. 전국 간호대 신입생 정원은 2007년 1만 1206명에서 올해 2만 3183명으로 두 배 이상 늘어났다. 하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으로 일을 시작하는 간호사들이 현장에 쉽게 적응하지 못한다는 문제점도 눈에 띈다. 병원간호사회에 따르면 2018년 42.7%, 2019년 45.5%, 2020년 47.7%만큼의 신임 간호사가 열악한 근무환경으로 인해 취업 1년 이내에 의료현장을 떠나고 있다.

간호학과 교수들은 신임 간호사들의 이탈률을 낮추기 위해 대학 교육과 실무환경의 괴리를 줄여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일례로 ‘의료 보조’라는 업무는 의료계에 공식적으로 인정되진 않지만 암암리에 존재하는 이른바 ‘유령 업무’인데 이 업무를 간호사들이 맡게 되는 경우도 적지 않아 이 같은 업무들을 간호법이라는 독립 법안에 명시해 의료 체계의 혼선을 줄여야 한다는 설명이다.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은 의료현장에 1만 명 이상의 의료 보조 간호사가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남정자 마산대 간호학과 교수는 “간호법이 필요한 이유 중 하나로 간호사의 업무 정의가 필요하다는 점이 꼽힌다. 이는 학생들이 졸업 후에 간호사 인력이 부족하니 취업은 잘 되지만 막상 현장에서 간호사들이 업무 외의 일까지 과다하게 맡는 일이 잦아서 버티지 못하고 그만두는 경우가 많다”며 “대학에서는 간호사가 맡는 업무에 대한 교육만 학생들에게 제공하는데 현장에서는 의사의 업무까지 맡게 되는 경우가 있으니 대학 차원의 간호교육이 의미가 없어지는 상황도 발생한다. 간호학과에서 의사 업무까지 가르칠 수는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신임 간호사들에게 현장 직무를 가르칠 선배 간호사가 과중한 업무로 후배 간호사들을 제대로 가르칠 수 없어 이탈 문제가 심각해진다는 시각도 있다. 이에 대응해 간호법은 신규 채용이나 보임된 간호사, 간호대학생에게 직무수행에 필요한 지식, 기술 및 역량 등을 전수하고 적응을 지원하는 ‘교육전담간호사’를 병원급 의료기관에 배치하도록 정하고 있다. 백찬기 대한간호협회 홍보국장은 “의대와 다르게 간호대학은 교수들이 실제 현장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 한계가 있다. 때문에 병원에 입사한 간호사가 실제 업무를 가까이에서 배울 수 있는 적응 기간과 담당 간호사가 필요하다”며 “간호법에 명시된 교육전문간호사를 병원에 배치한다면 적응이 어려워 퇴사하는 신임 간호사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고 밝혔다.

충북보건과학대 간호학과 교수 및 학생이 간호법 제정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사진=한국대학신문DB)
충북보건과학대 간호학과 교수 및 학생이 간호법 제정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사진=한국대학신문DB)

■ 지역 노인 인구 갈수록 늘어나는데…의료 인프라 열악한 지역의 환자 문제 대비해야 = 간호계를 제외한 의료계에서는 ‘지역사회 의료서비스 질 강화’라는 간호법의 골자가 간호사들이 단독 개원을 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를 표하면서 간호법을 반대하고 있다. 이에 대해 간호계는 인구구조의 변화, 지역 인구소멸에 따라 기존 병원 중심의 진료시스템과는 다른 방향의 환자 돌봄 방향을 모색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생각해달라는 입장을 밝혔다. 미래사회의 간호사들은 지금과는 다른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지자체와 연계해 지역소멸 등 지역 문제를 해결하는 대학의 역할이 강조되면서 안정적인 지역 의료서비스 공급을 위해 간호법이 뒷받침된 지역사회 중심 보건의료 체계를 만들고 대학 교육이 병행돼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일반적으로 해외 보건의료 체계의 경우 의료기관 중심과 지역사회 중심 두 가지 체계로 나눠 운영된다. 지역사회 중심 보건의료 체계는 간호법 1조에 표기된 ‘모든 국민이 의료기관과 지역사회에서 수준 높은 간호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필요한 사항을 규정한다’는 조항에서 알 수 있다.

남정자 교수는 “대한민국 인구구조가 노년층이 증가하는 형태로 바뀌었기 때문에 지역 중심 보건의료 체계에 대한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며 “병원에 입원하지 않는 사람들도 건강 관리가 필요한 시점이 오게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이런 환자들에 대한 대처가 충분히 마련돼 있지 않은 상황이다”고 주장했다. 이어 “앞으로 지역소멸은 더 가속화될 것이고 의료 인프라가 적은 지역에서 통원치료가 힘든 노인들을 효율적으로 돌보기 위해서라도 간호법을 통한 법적 밑바탕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한국간호협회는 간호법이 간호학과 학생들에게 필요한 이유로 급격히 늘어난 간호대학에 비해 교육 체제를 정비할 방안이 적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전국 간호대학은 2008년 이후 매년 빠르게 정원을 늘려왔다. 백찬기 홍보국장은 “간호학과 규모의 성장 속도보다 학생들이 현장 실습을 진행할 공간이 더디게 늘어나 지방 간호학과 재학생의 경우 방학 기간에 남는 실습 공간에서 교육받는 경우가 많다”며 “간호사의 처우가 개선되면 학생들이 공부할 수 있는 여건도 마련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박금숙 한국전문대학간호학부장협의회장(원광보건대 간호학과 교수)은 “이번에 간호법을 둘러싼 논쟁이 정치적인 목적과 계산에만 치우쳐 실망스럽다. 미래 간호사가 될 학생들이 보다 나은 현장에서 근무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편 대한의사협회 비상대책위원회는 “지난 간호협과의 대립 과정에서 간호법은 간호사 처우 개선을 위한 법이 아니라 기득권 간호 세력의 이권을 위한 법이라고 결론지었다”며 “더불어민주당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강행된 법임이 드러났기에 법안 폐기는 당연한 결과로 볼 수 있다”고 밝혔다.

의원들은  간호법에 새로운 논의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배준영 국민의힘 의원은 “간호사들의 처우 개선을 위해 의사 증원 등 근본적인 법 개정이 필요하다는 데에는 동의한다”면서도 “갑작스러운 법 제정보다는 논의를 통해 새로운 조항, 타협점을 찾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에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민주당은 간호법에 대해 다시 한번 발의하고 논의하며 발전시킬 방침이다. 이 과정에서는 정부·여당이 무조건적 반대가 아닌 책임 있는 자세로 함께 논의해야 할 것”이라고 촉구했다.

저작권자 © 한국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