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의 날이 되면 학생들은 교수들의 가슴에 꽃을 꽂아 준다. 여자대학에서 인기 있는 교수는 이 때가 되면 연구실이 온통 꽃집으로 변하기 쉽다.

그런데 이 날의 꽃이 스승의 은혜에 대해 감사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라면 그것은 초중고 교사들의 가슴에 꽂힌 것만큼 어울리지는 않는다. 물론 +초중고도 촌지문제 등으로 꽃의 의미가 변질되는 경우도 많지만 그래도 과거의 전통적인 스승의 의미를 따져보면 대학교수들의 가슴에 달아주는 이 날의 꽃은 아무래도 좀 어색한 편이다. 왜냐하면 스승의 의미가 지식의 전달보다도 인생의 안내자라는 데 더 무게가 주어지고 있는 것이라면 +대학교수들은 이 역할에 너무 무심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 이유는 물론 학문적 연구에 더 비중을 두는 역할 자체의 차이에도 있지만 초중고 교사들처럼 교수가 학생들에게 인격적 감화를 주기에는 학생들이 너무 커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이유 때문에 교수가 인생의 스승으로서의 역할을 포기하는 것은 반드시 정당한 것은 아니다.

대학생들은 이미 다 큰 어른같지만 사실은 인생에 대해서 너무 모른다. 그들은 입시준비에만 매달리다가 세상에 대해서는 백지의 상태로 대학생이되고 그 다음에도 취업준비에만 바빠서 인생에 대한 자기철학을 정립해 나가기 힘들다.

이런 학생들에게 교수들은 학점 내주고 졸업만 시키면 할 일을 다하는 것일까.

얼마전까지만 해도 교수에게는 그 이상의 역할을 아무도 특별히 강요하지는 않았다. 운동권 학생들에 대한 특별지도가 요망되기도 했지만그것은 대개 학과장이나 학생처 직원들의 몫이였다.

그런데 지금은 사정이 아주 다르다. 강의만으로 역할이 끝날 수 있었던 것은 졸업후 그들의 인생을 대개 기업체들이 떠맡아 주었기 때문이다. 명문대학의 인기학과 학생들은 졸업장을 받기도 전에 입도선매로 갈 길이 정해졌었다. 그런데 지금은 대다수의 학생들이 졸업후의 갈 길이 +막막해진 것이 아닌가. 그래서 지금은 이 암담한 시기를 조금이라도 유효하게 보내기 위해서 미리 입대를 지망하는 학생들이 많아졌다. 그리고 그 길마저 초만원이니 더욱 딱하다.

또 입대를 위해서가 아니라도 휴학계를 내는 학생들이 많아졌다. 그래서아르바이트를 하려 하지만 그것도 자리가 쉽지 않다.

아르바이트도 얻기 어렵고 입대도 빨리 안 되고 졸업해도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해진 다수의 학생들의 장래에 대하여 교수들은 과연 아무런 책임도 지지않고 그만일 수 있는 것인가.

이제는 같은 학문적 연구와 공부 잘하는 제자를 키우는 것만으로 역할이 끝날 수 있는 교수의 시대는 지났다. 왜냐하면 그렇게 키워 줘도 그들이 계속적인 연구활동이나 사회적 참여의 기회를 갖지 못하고 졸업과 함께 갈 길을 잃고 방황하는 신세가 된다면 그것은 자식을 낳아서 길거리에 내던지는 비정한 부모나 마찬가지의 잘못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록 지금의 이 상황이 한시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이것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긴박한 상황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이런 시기에 과연 교수는 무슨 도움을 학생들에게 줄 수 있을지 그들 자신도 막연할 지 모르지만 자주 대화를 함으로써 함께 문제를 논해 +나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인생의 길잡이 역할이 될 것이며 교수도 스승의 날에 가슴에 꽃을 다는 일이 어울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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