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기획]대학도 학계도 외면한 인문학, 늪에 빠지다

A&HCI 탈피 평가 필요... 인문학의 사회적 교류 유도해야

2015-01-04     차현아·김소연 기자

A&HCI 국제학술지 등재해야 승진·재임용 가능해
정작 해외연구자들 'A&HCI급 학술지' 의미도 몰라
역사왜곡 대응할 인문학 연구는 설 자리를 잃어

[한국대학신문 차현아·김소연 기자] 인문학이 흔들리고 있다. 교육, 연구, 사회 등 영역에서 인문학의 위기담론이 흘러나온다. 취업률이 낮다는 이유로 인문학과는 학과 통폐합 1순위로 꼽히고 있다. 외국 학술지 등재 논문만 가치 있는 연구로 인정받는 풍토 탓에 연구영역에서도 인문학은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이로 인해 국제학술지에 등재하기 위한 인문학 연구만 활발한 것이 현실이다. 역사 왜곡 상황에 대응해 우리만의 성찰과 논리를 만들어가야 할 인문학이 제 역할을 못한다는 지적까지 나온다.

■ 대학도 학생도 외면한 인문학 ‘퇴출 1순위’=인문학이 꽃펴야 할 대학에서 정작 인문학은 퇴출 1순위로 꼽히고 있다. 대학 구조조정과정에서 취업률이 주요 평가지표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항공대에서는 교육부 특성화 사업으로 인한 정원 감축분 4%의 대부분을 영어학과의 통폐합에서 끌어오고 있다. 경영학부와 영어학과를 통폐합하고 정원을 대폭 줄인 것이다. 중앙대는 지난해 독일어문학‧프랑스어문학‧러시아어문학‧일어일문학 등을 유럽문화학부와 아시아문화학부로 통폐합했다. 대학의 이런 움직임은 현재 진행형이다.

▲ 대통령직속 청년위원회는 지난달 전국 대학교 3,4학년 재학생783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출처:대통령직속 청년위원회)

대학에서 인문학을 전공하는 학생들도 이 같은 위기의식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 인문학 전공 대학생들도 본인의 전공이 현실적으로 도움 되지 않는다고 인식한다. 대통령직속 청년위원회는 지난해 10월 전국 대학교 3,4학년 재학생783명(인문계 481명, 이공계 302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자신의 전공과 관련된 직업을 가질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인문계생 32.5%만 ‘그렇다’고 답했다. 같은 질문에 이공계생 62.1%와는 차이가 크다.

지방 모 대학 국문학과 4학년에 재학 중인 한 학생은 “지방대에서 인문학 전공한 학생들은 취업할 곳이 없다. 임시직이나 계약직, 혹은 일자리가 있는 지역 유통업체에 취업하는 것이 현실”이라고 자조했다.

■ 외국 학술지 등재만 우수논문... 인문학 위기 부추겨= 대학 인문학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인문학 토대가 황폐화됐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특히 각 대학들이 A&HCI급 논문만 지나치게 높게 평가한다는 지적이다. 국내 학술지 등재보다 A&HCI에 등재해야 2~3배 이상의 연구 성과 점수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연구 성과 점수이외의 특혜도 주어진다. 성균관대의 경우 영어로 A&HCI에 논문 개재 시 300만원의 성과금을 지급한다. 서울시내 한 대학의 인문학 연구소에서는 아예 이른바 ‘A&HCI급 학술지’를 만들기 위해 대부분의 연구비를 쏟아 붓고 있다.

중앙대 HK교수는 A&HCI, SSCI급 학술지 성과가 한 편 이상 반드시 있어야 승진과 재임용 기준이 충족된다. 인문사회예체능 계열 교수가 A&HCI 등 국제학술지에 논문을 등재하면 한국연구재단 등재지보다 3배 이상의 지원금을 받을 수 있다.

연세대는 인문분야에서 국내학술지 1등급에는 150점을, 국제학술지 1등급에는 400점을 부여해 국제학술지에 2배 이상의 가산점을 준다. 학문분야를 가리지 않고 국제 학술지 중 네이처, 셀, 사이언스 과학 저널인 이른바 NCS급 논문은 무려 1000점을 부여한다. 서강대는 한국학의 경우 예외 규정을 뒀지만 인문사회 및 경상계열 소속 교원이 국제저명지에 1편의 논문을 쓰면 이를 2편으로 인정한다. 

그러나 정작 국제 인문학계에서 A&HCI는 공신력이 떨어진다는 평가가 나온다. A&HCI는 미국의 사설 업체에서 만든 인문‧예술 분야의 학술지 편람 및 학술정보 데이터서비스에 불과하다는 게 이들의 설명이다. 정작 독일과 프랑스 등 인문학의 전통이 깊은 국가에서는 A&HCI 자체를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다.

이종관 성균관대 교수(철학)는 “정작 외국의 인문학 학자들은 A&HCI를 알지도 못한다. 외국 학술대회에서 만난 교수에게 A&HCI가 무엇인지 한참을 설명해야 할 정도”라고 말했다.

학문 분야마다 논문 등재가 쉬운 전공과 그렇지 않은 전공 간 간극이 크다는 문제점도 제기된다. 러시아어문학의 경우 전 세계 통틀어 등재된 학술지가 4개에 불과하지만 언론학 분야 등재지는 50여개에 달한다. 중어중문학 관련 학술지에 논문을 등재하려면 한국인 연구자가 영어로 중문 논문을 써서 올려야 하는 웃지 못할 촌극도 벌어진다.

이런 차이를 반영하지 않은 채 인문사회 분야로 묶어 일괄적으로 평가를 할 경우 몇몇 학문은 고사위기에 놓일 수 있다. A&HCI 등재 학술지에 반드시 등재해야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시스템 속에서 다양한 연구가 진행되기는 어렵다.

위행복 한양대 교수(중국학)는 “특히 역사와 철학의 경우 국적이 분명한 학문이다. 만주 문제와 독도문제가 대표적이다. 이런 문제의식을 담은 논문이 미국 중심의 학술지 시스템에서 받아들여지기는 힘들다. 결국 역사와 철학 같은 우리 학계에서만 나올 수 있는 인문학이 위기를 맞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 인문학 본연의 가치 살린 평가 방식으로 개선해야= 전문가들은 저술과 저서의 질을 판단해 연구업적을 평가하는 문화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김영 인하대 교수(국어교육학)는 “저서를 쓰는 일은 논문과 달리 장기적인 연구가 필요한 작업이다. 공공의 이익을 위한 인문학 연구를 이끌어내기 위해선 저서 평가가 확대돼야 한다”고 말했다.

또 인간을 존중하고 삶을 성찰하는 인문학 본연의 가치를 사회와 지속적으로 공유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는 의견도 제기됐다. 인문학이 연구소에만 머무르는 지식이 아닌 인간을 이해하고 삶의 변화를 이끌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다.

김성민 인문한국연구소협의회장(건국대 교수)은 “인문학은 가장 기본 중의 기본이 되는 학문이다. 인문학 연구가 이론이 이론으로만 끝나지 않고 사회와 지속적인 교류가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종관 교수는 “인간애를 실천하는 사회적 활동에 참여하는 학술활동을 장려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