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 ⑭ 나의 소년기와 아버지의 비밀

윤형섭 전 교육부 장관(전 교총 회장)

2021-03-22     한국대학신문

해방되던 그 날, 나는 용인군 백암면 근창리에 살고 있었다. 머지않아 미국의 B-29가 서울을 폭격할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던 어느날 조선총독부의 소개령이 떨어졌다. 그러자 아버지의 극력 반대가 있었으나 어머니의 완강한 고집 때문에 이곳으로 피난 온 것이었다. 얼마 후 아버지께서 내려오셔서 내게 한글 자모음 24자를 가르쳐 주시고 일주일 내에 우리말로 편지를 써보내라고 하셨다. 별 문제 없이 그리했다.

그로부터 불과 반 년이 채 되기도 전에 일본의 무조건 항복이 일본 천황의 육성으로 라디오 방송을 통해 흘러나왔다.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어른들께 전후좌우 사연을 듣고 보니 어리석을 만큼 천진난만했던 나의 소년 시절은 온전히 사기당한 인생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억울하고 부끄럽기 짝이 없다. 무엇보다도 아버지께서는 내가 아무리 어리더라도 더 일찍이 이런 역사적 진실을 왜 안 알려주셨는가? 그러고 보니 지난 몇 년간 아버지에 대해서 이해 안 되는 일이 더러 있었다.

나는 1940년 3월 서울의 C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던 이듬해였다. 학교생활을 내 나름대로는 착실히 했다. 나는 충실한 일본의 황국신민이 돼가고 있었던 것이다. 독일, 이탈리아와 서둘러 동맹을 체결한 일본은 드디어 1941년 12월 8일 하와이 진주만을 폭격하면서 일본 군국주의의 본색을 드러냈다. 태평양 전쟁이다. 전쟁은 무려 3년 8개월이나 이어졌다. 나같은 10살 전후의 어린 초등학생들도 근로봉사란 이름으로 강제노동에 동원됐다. 오늘의 안목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아동학대라 하겠다.

매일 아침 조회 시간에는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여 동방요배(일본 황실이 있는 동쪽을 향해 최경례를 하는 행위)를 해야 했다. “우리는 대일본 제국의 신민이다”로 시작되는 삼 절짜리 ‘황국신민의 선서’를 외쳐야 했다. 지금 생각하니 더욱 기가 막히고 한심한 것은 기원절(일본의 건국기념일)이나 천장절(일본 천황의 생일)에는 교육칙어(1890년 일본 메이지 현황이 공표한 도덕과 교육의 진흥에 관한 지침서)를 교장이 낭독한 다음 봉안전(일본 천황과 황후의 초상과 교육칙어를 넣어둔 사당 같은 집)에 안치가 끝날 때까지 전교생이 눈을 감고 고개를 땅에 박도록 숙여야 되는 절차다. 그뿐 아니라 학교에 오고 갈 때마다 그 앞에 가서 공손히 최경례를 해야만 했다. 말하자면 신성문화가 지배하던 시기였다. 이게 바로 전체주의적 독재체제를 받쳐 주는 정치종교다. 이러한 문화와 정치종교가 사라지지 않는 한 현대적인 합리적 민주정치 체제는 상상도 할 수 없다.

나는 ‘고꾸고(こくご, 일본어)’도 남보다 열심히 했다. 여름방학 중에 고꾸고 교과서를 다 외우라는 숙제를 순진하게 다 한 학생은 나 하나뿐이었다. 점심시간에 교장실에 불려가 마이크에 대고 교과서를 크게 낭독하고 상으로 큰 배지(벗꽃)를 가슴에 단일도 있었다. 그런 날엔 으레 구보로 15분 거리에 있는 H기독교 사립 소학교에 계신 아버지를 향해 뛰어가기도 했다. 그날도 그랬다. 자랑하고 칭찬을 받기 위해서였다. 그날도 역시 아버지는 기뻐하지도, 칭찬하지도 않으셨다. 도리어 쓴 오이를 씹는 표정이었다. 나는 무안하기도 했고 서운하기도 했다. 그 후로는 아무리 큰 상을 받아도 다시는 그렇게 뛰어가지 않았다.

그 밖에도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더러 있었다. 가령 매일 밤 9시에 우리 삼형제에게 놋수저만 들고 적선동 영추문 건너편에 있는 설농탕집에 가서 먹고 외상장부에 달고 오라는 분부셨다. 며칠간 열심히 가서 먹었다. 더는 먹을 수가 없었다. 겨우 일곱 살 된 내 동생은 졸려서 못 먹겠다며 밤마다 울었다. 아버지께서는 숟가락을 꽂았다가만 와도 좋으니까 계속하라는 것이었다. 참으로 이상했다. 우리에겐 말할 수 없는 고역인데 왜 이렇게 강제로 먹이시는걸까? 외상값은 한 달에 한 번씩 갚는다 하셨다. 이 고역은 1944년 문밖(성북동)으로 이사 갈 때까지 계속 됐다.

그 무렵 우연히도 어머님께서 큰누님(나 보다 20살 위)과 나누는 밀담을 엿들은 일이 있었다. 아버지께서 우리를 적선동 설농탕 집으로 보내시고는 가끔이지만 혼자서 어딘가를 다녀오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조심스럽게 살펴본즉 땅문서가 하나씩 없어진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아마 요즘 노름판에 다니시는가 보다”라고 의심하는 것이었다. 하기야 당신의 아버님께서는 조선조 말에 충청도 문의 군수를 하셨고, 할아버님께서는 황해도 연백 군수를 지내셨으니 여기저기 땅문서도 있음직 했겠으나 그 모든 것이 내게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언젠가부터는 우리집 아랫방에 일찍이 뵌 일이 없는 부인이 와서 사셨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아저씨, 아주머니라고 불렀다. 그래서 그랬는지 우리에게는 어머니보다 더 늙어 보이는 그녀를 누님이라고 부르라 했다. 얼마 동안 지내고 나더니 그 누님께서 그 방에 내재봉소를 차렸다. 이 또한 나에겐 전혀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다.

2차 세계대전 종전과 더불어 찾아온 조국의 해방은 우리 민족 재생의 행운이었지만 내게는 앞에서 말한대로 아버지께 대한 의문과 의심이 한꺼번에 풀리는 황금 열쇠였다. 그 모든 것은 아버지께서 국내에 숨어서 위장복종을 하면서까지 독립운동자금을 보내고 국내 비밀 아지트 역할을 하며 끝내 버텼던 독립운동 때문이었다. 이와 관련된 모든 비밀은 하늘 아래 둘도 없을 만한 대표적 독립운동가 우당 이회영 선생(1932년 여순 감옥에서 옥사)의 지시대로 가족들에게까지 철저히 감췄던 것이었다.

내가 학교에서 아무리 큰 상을 받아도 아버지께는 그게 도리어 마음의 고통이었고, 적선동 설농탕 집은 독립운동자금 공급기지였으며, 땅문서 사건은 노름판에서 날린 것이 아니라 팔아서 독립운동자금으로 보내기 위함이었다. 아랫방 내재봉소의 그 누님은 바로 우당의 미망인(이은숙 여사)이었으며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 이시영의 형수였다. 이종찬 전 국정원장과 이종걸 전 국회의원이 바로 우당의 손자다. 내가 소년기에 의심했던 아버지의 모든 비밀은 이 나라의 해방과 함께 하늘 아래 말끔하게 풀린 셈이다.

※ ‘살며 생각하며’는 대한민국 저명인사의 인생 스토리와 철학, 경험담을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이번 ‘살며 생각하며’에는 윤형섭 전 교육부 장관(전 교총 회장)이 함께 합니다.

■윤형섭 전 교육부 장관은...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연세대와 미국 존스 홉킨스대에서 정치학 석사학위, 연세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연세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학생처장, 사회과학대학장, 행정대학원장 등 주요 보직을 맡았다. 한국정치학회 회장,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회장, 건국대 총장, 호남대 총장, 교육부 장관 등을 역임했다. 현재 연세대 명예교수다.

<한국대학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