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 ⑰ 한·소 교육교류협력각서 체결과 불길한 예감
윤형섭 전 교육부 장관(전 교총 회장)
1991년 늦봄의 어느 날, 나는 모종의 결심을 끝내고 노태우 대통령께 독대를 요청했다.
당시 우리 정부는 오랫동안 금기시했던 공산권과의 수교를 추진하며 신북방정책을 강력히 추진하고 있었던 때였다. 국제환경과 국민 의식도 이미 그 방향으로 전환되고 있던 시기였다.
소비에트 연방(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1985년 3월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가 취임했고 4월에 그는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와 글라스노스트(Glasnost, 개혁과 개방) 즉 소련의 전통적인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의 개혁을 선언했다. 스탈린주의(Stalinism)의 병폐를 개혁한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탈(脫)이데올로기화, 탈(脫)군사화 바꿔말하면 지구촌에 새로운 평화 질서를 구축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우리나라 정부가 헝가리, 소련과 국교를 정상화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나는 독대를 통해서 대통령께 직접 건의하는 것이 보안 유지와 신속한 결론을 얻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각하, 현 정부의 공산권 수교와 북방정책은 한반도뿐만 아니라 동북아 국제 정치에 커다란 변화를 불러올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로선 아무런 실체가 안 보입니다. 그러므로 범정부적인 차원에서 실적을 축적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교육부가 우선 소련과 교육교류협력각서를 체결토록 하겠습니다. 그다음은 중국입니다. 소련과 중국을 우회해서 북한에 진입해 북한의 개방과 개혁을 촉진케 할 생각입니다.”
나의 주장에 “윤 장관 소신대로 하시오”라는 대통령의 승낙이 즉석에서 떨어졌다.
일은 급속도로 추진됐다. 소련 국가교육위원장 야가딘의 초청으로 그해 8월 17일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19일 아침 10시에 교육교류협력각서를 체결키로 했다. 흥분될 만큼 놀랄만한 성과가 기대됐다.
그런데 이 어쩐 일인가? 앞에서 말한 기대와 동시에 어쩌면 내가 살아서 돌아가지 못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주(駐)모스크바 북한 대사관 측의 조짐이 심상치 않다는 정보도 있었다. 모종의 각오마저 해야만 했다. 입 밖에 낼 수도 없는 일이었다. 예감이란 원체 과학적 근거와 객관적인 논리의 세계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예정대로 금승호 사회국제교육국장, 정봉근 교육협력과장, 장기원 사무관, 몇 명의 수행원을 대동하고 모스크바에 도착, 공로명 주소 대사(후일 외무부 장관)와 관계관의 도움을 받으며 각서 체결 약속시간인 19일 아침 10시를 기다렸다.
그런데 아뿔싸, 하필이면 그날 새벽에 붉은 군대의 쿠데타가 발발한 것이다. 새벽까지 텔레비전으로 CNN 뉴스를 듣고 있었는데 갑자기 쿠데타 소식이 급보로 나오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나는 급히 내가 묵고 있었던 호텔 옥탸브리스카야(Oktyabrskaya)의 창문을 열고 내려다봤다. 한국전쟁(6·25 전쟁) 때 봤던 것과 비슷한 탱크가 크렘린(Kremlin) 광장으로 계속 진입하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아하! 이게 바로 내가 출국 전에 까닭 없이 들었던 불길한 예감의 실체구나. 출국 직전에 겨우 매듭진 내 딸의 혼사 결정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이었구나”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다행히 나는 예정대로 야가딘 소련 국가교육위원장 일행을 만나 한·소 교육교류협력각서 서명식을 아슬아슬하게 마칠 수 있었다. 아마도 이것이 소련이 외국과 체결한 마지막 협약이었을 것이다. 내가 본국 정부로부터 급거 귀국하라는 소환령을 전달받은 것은 그 직후의 일이었다.
급하게 금 국장 이하 전 수행원을 모아놓고 나의 비장한 결단을 밝혔다.
“나는 방금 본국 정부의 소환 명령을 받았다. 나는 대통령 명령을 따를 테니 그대들은 내 명령을 따르라. 사후의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알마아타(Almaty)로 직행해 예정대로 한국교육원 개원식을 주관케 했다. 금 국장 일행은 성공적으로 임무를 마치고 전원 무사히 귀국했다.
다행히도 소련 붉은 군대의 쿠데타는 예상했던 대로 삼일천하로 끝났다. 보리스 옐친(Boris Yeltsin)은 쿠데타군의 탱크에 올라타고 시민의 환호를 받았다. 1989년 동구 공산권이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동서독이 통일되고 소련이 해체돼 독립국가연합(CIS)이 출범하는 데까지 불과 2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나는 한·소 교류협약체결로 인해서 귀국 후에도 곤욕을 치렀다. 국정감사장에서 야당의 L 의원은 내게 “쿠데타 정권과 협약을 체결했으니 우리나라는 앞으로 대외관계가 심히 난처하게 됐다. 이에 대한 책임을 지라”며 맹공을 퍼부었다.
나는 L 의원의 주장이 사실과도 다르고 사태를 보는 시각과 해석에도 동의할 수 없다는 내용으로 항변했다. 밤 12시가 넘어서야 종합국정감사가 끝났다. 장관실에 돌아와 탁상 위에 놓인 D일보 석간을 들여다보는 순간 아차 했다. 조금 전 L 의원이 내게 했던 공격성 발언 내용이 이미 1면에 대서특필로 보도돼 있었다. 국회의원이 자기의 발언 내용을 미리 언론에 제공함으로써 장관의 반론 내용 보도를 사전에 봉쇄해버린 것이다. 나는 그의 비신사적 술책과 여론 왜곡에 분노와 실망을 금할 수 없었다.
어쨌든 불길한 예감은 이처럼 끝까지 나를 괴롭혔다. 그러면서도 위로가 되는 것은 그 후 러시아와 중국에 한국교육원이 도처에 설립됐고 학술·문화·교육의 교류가 연이어 활발해졌다는 사실이다. 1991년 8월 구소련 땅 카자흐스탄 알마아타에서 출범한 한국교육원은 1992년 5월에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Tashkent), 1995년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 1997년 하바롭스크(Khabarovsk) 등으로 퍼졌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1997년 12월 옌볜(延边)에, 1998년 8월 베이징(北京)에, 1999년 9월 상하이(上海)에, 2001년 3월 톈진(天津)에 속속 한국교육원이 들어섰으니 얼마나 보람 있는 일인가.
그러나 나는 출발 전의 불길한 예감과 체재(滯在) 중의 악몽을, 그리고 귀국 후의 분노와 실망을 그 대가로 지불해야만 했다.
※ ‘살며 생각하며’는 대한민국 저명인사의 인생 스토리와 철학, 경험담을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이번 ‘살며 생각하며’에는 윤형섭 전 교육부 장관(전 교총 회장)이 함께 합니다.
■윤형섭 전 교육부 장관은...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연세대와 미국 존스 홉킨스대에서 정치학 석사학위, 연세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연세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학생처장, 사회과학대학장, 행정대학원장 등 주요 보직을 맡았다. 한국정치학회 회장,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회장, 건국대 총장, 호남대 총장, 교육부 장관 등을 역임했다. 연세대 명예교수다.
<한국대학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