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후쿠오카의 윤동주와 이애주 교수

이애주 교수를 추모하며… 김우종 전 본지 주필

2021-05-17     한국대학신문
후쿠오카의 진혼무, 이애주 교수 (2016 김우종 作)
김우종 전 본지 주필

이 나라의 전통적인 한국춤 무용사에서 이애주 교수는 확실히 이단자다. 시국춤 정치춤의 딱지가 붙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빛나는 민주화 운동의 공로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예술의 순수성을 배반하고 있다는 듯한 비난과 빈정거림의 별칭이기도 하다.

고난의 역사 속에서 힘없고 배고픈 민중의 신음에 귀 막고, 눈 감고, 입 다물고, 현실을 외면하고, 도피하고, 운학(雲鶴)처럼 뜬구름 위에서 흙탕물 한 번 튕기지 않고 놀아야 예술가인 듯 자부하는 위선자들의 논리가 그것이다. 예술이 시국에 한눈팔고 정치하면 그날부터 예술가가 아니라고…. 더구나 진리 탐구의 전당을 지켜야 할 교수가 학생들을 길거리로 내몰고 선동이나 하다니…?

그는 이런 논리가 판치는 세상에서 한국의 고전적인 전통춤을 계승하면서도 이를 화려한 극장이 아니라 군사 독재 정권의 최루탄이 난무하는 격전장에서 공연했다. 젊은이들이 물고문으로 죽고 최루탄에 머리가 빠개져 죽는 민주화 운동의 현장 무대로 끌어 올린 이애주 교수의 파격과 그 충격은 한국만이 아니라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보기 어려운 새로운 창작 무용의 역사적 기록이다.

그 민주 광장의 예술이 1987년 6월에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으로 죽은 박종철과 연세대 교문 앞에서 최루탄으로 죽은 이한열을 위한 진혼춤이고 한풀이춤이다. 그리고 그 춤바람이 일으켜 나가는 함성과 눈물의 높은 파고가 마침내 전두환의 군사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6·10 항쟁이다. 그리고 그의 춤은 1995년 2월 14일에 일본 후쿠오카 구치소(옛 형무소) 뒤뜰 니시모모지 공원(백도서 공원)으로 이어졌다. 한국대학신문이 주최한 윤동주 50주기 추모위령제다.

이 교수가 서울에서 그랬듯이 그것은 분하고 억울한 윤동주의 넋을 위한 진혼무이며 한풀이춤이었다. 서울의 그것이 군사 독재 정권을 종식시키고 민주화에 기여했듯이 후쿠오카 구치소 뒤뜰에서 일어났던 그것은 큰 파고를 일으키며 지금도 한국과 일본 그리고 전 아시아와 세계에 변화를 일으키기 위한 역동적인 힘으로 계속 작동하고 있다.

한국대학신문은 1994년 가을 후쿠오카 옛 형무소를 사전 답사하고 다음 해 50주기 추모위령제와 시비 건립을 위한 모든 준비를 마치면서 50명의 추모 위령단을 그곳에 파견했다. 윤동주가 생체실험으로 죽은 것이 거의 확실한 2월 16일의 전야제가 되는 2월 14일이다. 현장에는 온 겨우내 완성한 형무소 담 높이의 걸개그림과 무대 현수막 제사상이 미리 설치되고 일본 측의 ‘윤동주의 시를 읽는 모임’ 회원 외에 한국 총영사 등 내빈 외 많은 사람들이 미리 기다리고 있었다.

이 행사는 추모제에 이어서 교토의 도시샤대(同志社大学)으로 자리를 옮겨 개최한 시비 건립과 문학 심포지엄이 있었으며 50명 추모단에는 교수, 문인, 기자, 학생 외에 이애주 교수, 양희은 가수, 풍물놀이패 장사익 등이 있었다.

이날 행사는 한일 양측에서 전한 추모사의 내용도 중요했지만 제사 형식의 진행 과정에서 이 교수가 제주(祭主) 역할을 많이 해내고 처음부터 끝까지 온몸이 슬픔의 강물이 돼 흐르고 멈추다가 흐느끼고 나비처럼 날아오르는 모습에서 참가자들이 넋을 잃고 더러는 울먹이며 눈물을 닦았고 이는 그 후 어느 정도 연례적 공동행사가 됐다.

“우리가 윤동주를 죽였습니다!”

가해자의 나라 니시오카 교수가 마침내 단상에서 울먹이며 절규하고 그 후부터 그가 할 일을 내 손을 잡으며 다짐한 것은 무엇일까? 다시는 그런 전쟁을 하지 않을 사랑과 평화를 다짐하는 약속. 이를 위해 그는 10년 넘게 후쿠오카에 시비 건립 운동을 계속하다가 실패했지만 그래도 모든 사실을 밝히는 책을 내며 역사의 기억을 위한 작업을 계속하겠다고 한다.

아마도 그날 광장에서 이애주 교수가 온몸의 전율로 전한 메시지는 그때 모든 것을 취재하고 보도한 신문과 방송으로 전국에 알려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날 후쿠오카에서 일어났던 그것은 다음 해부터 교토와 오사카와 도쿄 등으로 계속 확산했고 시비 건립 운동이 되었다.

지금도 매월 한 번씩 후쿠오카에서부터 홋카이도까지 양국의 젊은이들이 컴퓨터 모니터로 얼굴을 보며 윤동주 시간을 갖는 행사가 이어지고 있다. 그것은 전쟁의 악몽을 기억하며 사랑과 평화를 다짐하자고 1995년에 다짐한 약속의 연장이다.

그의 춤이 한국에서 그랬듯이 일본에서의 그것도 슬프고 억울한 자들을 달래주고 온 세상에 사랑과 평화의 정신을 전해준다면 그보다 더 큰 보상이 어디 있으랴. 물론 그 보상은 내가 드리는 것이 아니어서 염치가 없지만.

<한국대학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