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와 더불어] 통일논의, 발상의 전환

2000-08-26     
최완규 교수 (경남대 북한대학원)

민족의 통일만큼 한반도 전체 성원이 절절히 염원하면서도 쉽사리 도달하기 어려운 민족적 과제는 없을 것이다. 남북관계의 획기적 진전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의 통일은 유감스럽지만 여전히 '비현실'이다.

물론 정상회담을 비롯하여 고위급 회담, 이산가족 상봉 및 북한 +국립교향악단의 서울공연에 이르기까지 과거에는 상상조차 못할 남북관계개선의 획기적 전기가 지속적으로 마련되고 있다는 점에는 의문에 여지가 없다. 또한 앞으로 예정되어 있는 국제외교무대에서의 남북대화에도 커다란 기대를 걸어봄직 하다. 이 모든 변화의 징조들은 분명 남북관계가 냉전시대에 걸어 왔던 도정과는 전혀 다른, 일찍이 그 +누구도 밟아 본 적이 없는 신세계로 한민족을 이끌어 나갈 것이라는 낙관적 전망에는 나름의 타당한 근거가 없지 않은 것이다.

분명 오늘의 시점은 민족사적 전환점에 해당할 것이다. 과거의 역사가 +가르쳐주듯이 민족의 격변기에는 뜨거운 의지와 힘있는 열정이 요구되는 것만큼이나 차가운 지성과 신중한 사려가 반드시 필요하다. 민족의 역량을결정하는 두 가지 요소가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룰 때 비로소 우리는 +새로운 시대를 개척해 나갈 수 있다. 이것이 다가올 통일시대를 +준비하려는 남북한 지도자와 국민들이 기억해야 할 역사의 교훈이다.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사고를 요구한다. 만약 우리가 아직까지 통일을 단일국가의 수립이라는 20세기의 틀 속에서만 상상하고 있다면, 앞서 지적한 것처럼 여전히 통일은 멀기만 하다.

현재의 조건에서 중앙집권적 국가권력을 전제로 하는 단일국민국가(nation state)의 형성은 다음의 세 가지 가운데 어느 하나의 현실화될 때만 가능할 것이다.

첫째, 남북한의 협상을 통해 단일국가로 합의하는 방법, 둘째, 내전 혹은 내부의 모순에 의해 어느 한 국가가 붕괴하여 다른 한 국가로 흡수되는 +방법, 셋째, 두 국가가 동시에 붕괴하여 새로운 국가를 구성하는 방법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두 번째와 세 번째의 방법은 현상유지보다도 바람직하지 않은 또 다른 형태의 민족적 비극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다. 첫 번째의 방법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현실적으로 전쟁에 의해 점령당하지 않는 한 누가 자신의 체제와 이념을 상대방에게 양보할 수 있을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다시 말하면, 단일국가수립과 통일을 동일시하는 인식의 지평 아래에서는 역설적으로 통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통일과 단일국가수립을 분리하여 이해하는 인식의 확산은 민족공동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 필수 불가결한 작업이다. 작금의 +현실에서 민족의 공존·공영의 정신을 바탕으로 한 남북 상호간의 장기간에 걸친 교류, 협력과 평화공존을 통한 민족공동체의 형성은 남북관계 개선의 최대목표라고 할 수 있다.

단일국가 수립을 전제로 한 통일은 장기간에 걸친 화해와 협력의 산물로서 경제공동체와 다자간 안보공동체 형성을 중심으로 한 국가연합의 형성 이후에 발전적 형태로 제기될 수 있는 이상적 목표이지 민족적 당위나 +역사적 필연은 아닌 것이다.

어쩌면 민족공동체 형성을 지향하는 이 새로운 통일론은 세계화의 압력이 거세어지고 있는 오늘날 남과 북이 '공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지 +모른다. 이제야 말로 통일논의의 발상을 전환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