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의 예술가들] 노비 출신 도화서 화원 이상좌
백형찬 전 서울예대 교수
이상좌는 조선 전기 때 활동한 도화서 화원이다. 명종 때의 어숙권이 지은 ‘패관잡기’에 의하면 이상좌는 본래 어느 양반집 노비였다고 한다. 그런데 어렸을 때부터 그림에 소질이 뛰어나 중종 임금이 어명을 내려 도화서 화원이 됐다고 한다. 이상좌의 아들 이흥효 역시 화원이었는데 명종의 어진을 잘 그려 임금이 직접 수문장 벼슬을 내리기도 했다. 또한 조선 중기 화단에서 크게 활약해 ‘죽하관폭도’와 ‘수향귀주’를 그린 이정도 이상좌의 손자이다. 이렇게 이상좌의 집안 3대는 모두 조선 미술을 빛낸 훌륭한 화가들이었다.
노비인 이상좌가 어명으로 도화서 화원이 됐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조선 시대 노비는 공민권이 없어 벼슬길에 나갈 수도 없었고 노비의 자식들은 대대로 노비가 됐다. 노비 중에는 본래 양인이었으나 먹고 살기가 힘들어 노비로 전락한 이들도 많았다. 이상좌도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조상은 양인이었다가 먹고 사는 것이 힘들어 노비로 전락했을 수도 있다. 아니면 어떤 재상집에 양자로 들어갔다가 재상이 이상좌의 그림 재능을 보고는 임금에게 추천해 도화서 화원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상좌의 대표 작품으로는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송하보월도’, 삼성미술관 리움이 소장하고 있는 ‘이상좌불화첩’, 일본 야마모토문화관에 있는 ‘파교심매도’, 일본 지온인에 있는 ‘관음32응신도’를 들 수 있다. 그런데 이상좌가 그렸다고 확인된 작품은 국내는 물론 국외에도 없다. 작품 모두가 ‘전칭작(傳稱作)’이다. 전칭작은 ‘그렸다고 전해지는 작품’이란 뜻이다. 그래서 이상좌의 모든 작품 앞에는 전할 ‘전(傳)’ 자가 붙어 있다.
‘송하보월도’를 들여다보자. 세로가 거의 2미터 되는 이 그림은 미술 전문가들이 하나 같이 명작이라 격찬하는 작품이다. 캄캄한 밤이다. 험하고 가파른 낭떠러지 벼랑이 있다. 그 벼랑 중간에 기가 막히게 멋있는 소나무 한 그루가 박혀있다. 용이 하늘로 막 승천하려는 모습 같기도 하고 손과 다리와 목이 직각으로 꺾어진 무서운 좀비 모습 같기도 하다. 가지에는 넝쿨이 여기저기 달라붙어 바람에 흔들리고 있어 을씨년스럽다. 정말 기기묘묘한 소나무다. 그 소나무 위로 둥그런 달이 휘영청 밝게 떠 있다. 나무 아래로 한 선비가 조용히 거닐고 있다. 이상좌는 송하보월도로 안견 이후 조선 전기의 최고 화가로 인정받았다.
‘이상좌불화첩’을 살펴보자. 불화첩은 가로 31센티, 세로 50센티의 그림책인데 여러 가지 불상 그림이 그려져 있다. 십육나한을 그렸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현재 전해지는 것은 다섯 작품뿐이다. 나한의 모습을 붓에 검정 먹을 묻혀 빠른 속도로 스케치했다. 영감을 받아 떠오른 이미지가 흐려지기 전에 바로 서둘러 기록하려던 것 같다.
나한은 아라한으로 불교에서 수행자가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단계에 이른 자를 말한다. 부처의 경지에 오른 16명의 제자를 십육나한이라 하는데 나한은 신통력을 지니고 있어 인간의 소원을 들어준다고 해 믿음의 대상이 됐다. 이상좌는 그림의 밑바탕을 우선 흐린 먹으로 그리고 그 위에 진한 먹을 칠했다. 나한이 걸치고 있는 가사는 크고 작은 곡선으로 어지럽게 붓을 놀려 신비로움을 극대화했다. 반면에 얼굴은 가는 붓으로 세밀하게 그려 불공드리는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하다.
조선 시대의 훌륭한 명작들이 외국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특히 일본이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 때 약탈해 간 것이 많다. 훔쳐 간 작품들을 도로 찾아와야 한다. 이상좌의 ‘파교심매도’와 ‘관음32응신도’가 어서 조선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일본 땅에서 울고 있다. 한겨울 매화를 찾아가는 노인도 말 위에서 울고 있고, 금강대좌에 앉아 있는 관세음보살도 울고 있다.
<한국대학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