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학과 전폭 지원에 ‘문과 기피’ 우려 깊어진다

10년 동안 인문사회 분야 연구 수·연구비 지속적으로 감소 전문가들 “구체적인 정책 안 보여…학문 위축 아닌 고사 수준”

2022-07-27     이지희 기자
정부는 7개 부처 합동으로 반도체 인력양성 방안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지난 19일 박순애 부총리가 브리핑을 하고 있는 모습. (사진= 교육부)

[한국대학신문 이지희 기자] 정부가 교육부를 포함한 7개 부처 공동으로 반도체 학과에 대한 대대적인 지원에 나서면서 인문사회 분야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현재도 이공계열에 비해 정부의 지원이 부족한 상황에서 이른바 ‘문과 기피’ 현상이 더 심화될 것이란 이유에서다.

정부는 반도체를 미래산업의 핵심이자 국가 안보 자산으로 규정하고 모든 역량을 집중해 인재를 양성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2031년까지 15만 명의 반도체 전문 인재 양성을 육성하고 여기에 범부처 역량을 총동원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필요한 대폭적인 규제완화와 재정 지원도 약속했다. 대학설립운영 규정을 개정해 정원 증원에 필요한 4대 요건 중 교원확보율만 충족해도 정원증원을 허용하도록 했다. 관련 계약학과에 대한 규제 완화와 계약학과 신설, 반도체 특성화대학원 신설 등도 순차적으로 이뤄질 전망이다.

구체적인 예산 규모는 협의 중이라며 밝히지 않았지만 7개 부처가 공동으로 참여하는 만큼 막대한 예산을 지원할 것으로 보인다. 공개된 예산만 보더라도 내년 반도체 R&D 예산에 4129억 원을 투입한다. 과기부가 주도하는 인공지능 반도체 대학원에는 내년에 3개교를 선정해 6년 동안 165억 원을 지원할 예정이다. 그밖에도 반도체 특성화대학원 설립, 과기원 전공과정 확대, 계약학과 확대 등 수백억 원 단위의 예산이 투입될 지원 사업이 계획돼 있다.

정부가 반도체 인력양성 방안을 발표한 후 당장 인문사회 분야와의 균형 문제가 제기됐다. 지난 19일 교육부의 ‘반도체 인력양성 방안’ 브리핑에서는 “문과 우수학생 공동화 현상이라는 말이 나오는 가운데 기초학문이 타격을 입는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는 질의가 이어졌다.

박 부총리는 “(15만 인력 중) 4만 5000명의 인력은 실질적으로 반도체 분야를 키우지만 10만 5000명의 인력은 융합 인력으로 키우고자 계획하고 있다”며 “그 융합 인력 속에는 인문학적 사고를 가진 학생들이 빅데이터나 AI, 증강현실 등 기술과 더불어 세상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공하기 때문에 결코 문과를 소홀히 하는 정책으로 교육 정책이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모호한 답변만 남겼다.

■ 인문사회 분야 연구비 점유율·1인당 연구비 등 지속적 하락세 = 한국 기초학문 분야에서 최근 9년간 4년제 대학 인문계열 학과가 155개 사라진 것으로 나타났다. 2012년 962개였던 인문계 학과는 2021년 807개로 16% 가량 줄어든 것이다. 사회계열과 자연계열도 8% 줄었다. 반면 공학계열은 같은 기간 1333개에서 1446개로 8.5% 늘었다.

교육부의 최근 10년간 사회과학연구지원(R&D) 사업을 보면 2016년 과제 수 74개, 270억 원에서 2020년 과제수는 45개, 예산은 180억 원 수준으로 감소했다. 10년 전이었던 2010년 예산은 150억 원 규모였다.

특히 연구예산 배정과 연구비 수혜율 등 인문사회 분야에 대한 차별이 지속되고 있다는 게 학계의 주장이다. 한국연구재단이 발표한 ‘2019년 전국대학 대학연구활동실태조사 분석보고서’에 따르면 이공분야 1인당 평균연구비는 인문사회분야보다 약 6.3배 높았으며, 이공 분야가 인문사회 분야보다 과제수혜율은 16.9%가 높게 나타났다.

2020년도 4년제 일반대 중앙정부의 연구비 점유율을 살펴보면 공학 분야 연구비 점유율은 48.3%로 나타났다. 의약학은 18.9%로 공학과 의약학 분야의 연구비 점유율이 70%를 넘었다. 인문학은 1.7%, 사회과학은 5.3%에 그쳤다.

2014년 공학 분야는 연구비 점유율은 43.7%, 의약학 20.5%, 인문학 2.6%, 사회과학 7.1%로 10년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공학과 인문사회 계열 간 격차는 더 벌어진 것이다.

지난 2020년에는 ‘인문사회 분야의 안정적인 연구교육 기반 조성에 관한 청원’이 국회 국민청원에 올라오기도 했다. 청원자는 국가 R&D 예산이 10년간 두 배 증액 돼 24조 원이 되는 동안 인문사회 분야 기초연구 예산은 2900억 원에 불과하다고 설명했다.

2022년 예산안을 보면 △4단계 두뇌한국21 사업 △사회과학연구지원(R&D) 사업 등이 감액됐다. 두뇌한국21 사업 감액은 박사양성 사업의 계속 과제만 지원하게 된다는 이유로 전년 대비 76억 6000만 원의 예산이 줄어들었다. 사회과학연구지원(R&D) 사업의 경우 대·중·소 연구과제 규모 변동으로 사업 규모가 감소되면서 전년대비 15억 5000만 원의 감액이 이뤄졌다. 한국고전번역원 출연 사업도 4.6% 줄어들었다.

반면 인문사회 분야 사업의 예산 증액은 미미한 수준이었다. 인문사회 분야의 가장 큰 사업 중 하나인 인문사회기초연구 사업의 예산액은 전년 대비 1.7%인 31억 7500원 늘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출연 사업의 경우 전년 대비 9.4%인 30억 6500만 원 증액 편성됐다. 인문학진흥 사업의 경우 0.6%인 2억 4500만 원 증액에 그쳤다.

■ 인문사회 분야 지원할 정책 부재 우려…출구전략은 어디에 = 그러나 부총리 답변에서 알 수 있듯 구체적인 방안은 전무한 데다 인문사회 분야 강화를 위한 정책도 없어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정책 부재를 우려하고 있다.

지난 22일 한국인문사회총연합회와 한국사립대학교수회연합회 등이 주최한 토론회에서 위행복 한양대 명예교수는 “학령인구 감소로 대학교원도 감소하면서 교수채용 기피 현상이 인문사회 분야에 집중되고 있다”고 인문사회 분야 기피 현상을 우려했다.

위 교수는 “국가 R&D 예산에서 인문사회 분야의 비중이 계속 낮아져 2022년은 1.2%로 학문 분야가 간 불균형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면서 “현 정부의 국정과제에서도 인문사회 분야 학술연구의 진흥은 포함돼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류재한 한국인문사회총연합회 공동회장(전남대 교수)은 “반도체 인력양성 방안은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에 무게 추를 더 주면서 인문사회 분야를 위축이 아닌 고사하게 만드는 정책”이라며 “학문 발전에 비춰볼 땐 결코 좋은 정책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류 회장은 “반도체 산업이 지금 상황에서는 전망이 밝지만 나중에 시장이 줄어들거나 산업이 부침을 겪을 때 되돌리려고 하면 어떻게 할 것인지 출구전략이 없다는 것이 문제다”며 “한 쪽에 필요한 정책을 만들었다면 기울어진 다른 한 쪽을 위한 정책도 필요하다”고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