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通] 책은 무죄다!

정재영 동국대 미래융합교육원 대우교수

2024-05-05     한국대학신문
정재영 동국대 미래융합교육원 대우교수

‘중앙도서관, 100만 권 장서 소장 기념 백만책 행사 열어’
‘100만 번째 장서 등록식’
‘OO대 도서관 장서 100만 권 돌파’

2000년대 초반 신문 기사 제목들이다. 1990년대 후반까지 국내 대학 중 도서관에 백만 권 이상의 장서를 소장한 곳이 많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 실제로 1996년 교육부에서 발간한 ‘대학도서관 정보화 현황’에 따르면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한양대, 이화여대, 경희대 등 6개 대학만이 100만 권이 넘는 장서를 보유한 것으로 조사됐다. 지금이야 장서 소장 권수가 큰 이슈가 되지 않지만 당시만 해도 대학도서관의 100만 권 장서 확보는 뉴스거리가 되기에 충분했다.

좋은 대학이라면 최소한 100만 권의 장서는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뜬금없는 기준을 설정하고 앞다퉈 장서를 채우기 위해 혈안이 되다 보니, 전국의 대학도서관 사서들이 장서를 확보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일이 벌어졌다. 장서 100만 권을 단기간에 채우기 위해서는 어떤 상황이 벌어지는지 굳이 대학도서관에서 근무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장서의 질(質)이나 복본 문제는 차치하고, 중고책방에서 책을 트럭으로 구입해 장서인만 찍어 지하창고에 쌓아두기도 했다는 이야기가 대학도서관계에 공공연하게 회자되기도 했다.

책이 이토록 대학의 위상을 침해하고, 좋은 대학, 명망있는 대학으로서의 위상을 가로막는 요인이 됐다는 점에서 책은 유죄다.

대학 도서관에 책이 너무 많다…“포화율 200% 달하는 곳도”
‘古書의 명복을 빕니다…전국 대학 책 장례식’

최근 신문 기사의 제목이다.
불과 20년 만에 이제는 대학도서관에 책이 너무 많아서 문제가 되고 있다. 물론, 선진국에 비하면 장서가 여전히 부족하지만 공간을 확보하지 못하다 보니 장서의 증가가 마냥 반갑지만은 않은 상황이다.

실제로 이미 소장 책 수 한계치를 넘어선 대학도서관이 많다. 경북대학교의 한계 소장 책 수는 168만 8640권이지만, 실제 소장한 책은 342만 7573권으로 포화 비율이 203%에 이른다. 경북대 다음으로 포화 비율이 높은 곳은 제주대(189%), 부산대(173%), 서울대(160%) 등이고, 포화 비율이 가장 낮은 전북대학교도 113%라고 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학도서관에 소장하고 있는 책을 기증하겠다고 하면 고마운 마음을 담아 기념품과 감사장을 증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요즘은 누가 책을 기증하겠다고 하면 선뜻 반가워할 수만은 없다. 책의 물리적 가치가 예전같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소장공간의 부족이 가장 큰 이유다.

게다가 디지털 시대에 학생들이 책을 읽지 않으니 장서를 폐기하고 그 공간을 다양한 편의시설과 디지털 기기 활용공간으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시대와 기술환경의 변화, 그리고 이용자들의 요구를 반영해 공간을 변화시켜야 하지만 넘쳐나는 책 때문에 그러지 못하고 있다는 하소연이다.

책이 이토록 대학의 미래와 혁신을 저해하고, 공간만을 차지하고 있는 애물단지가 되었다는 점에서 책은 분명 유죄다.

책이 다시 본래의 가치를 인정받고 무죄를 증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보다 대학도서관들이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장서 소장공간 부족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시급하다.

늦었지만 정부의 ‘대학도서관 진흥종합계획’에 공동 보존 서고 건립에 관한 구체적인 추진 계획을 포함시켜야 한다. 물론 부지확보의 문제와 운영비 조달 등 현실적인 문제가 많지만 그렇다고 이런 상황을 계속 방관할 수만은 없다.

이제라도 책이 무죄임을 증명해야 한다!

<한국대학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