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현의 만화연구소] 세상에 대한 풍속과 풍자를 그려낸 만화 선구자들
박세현 (사)한국만화웹툰평론가협회장
만화의 칸을 구현한 풍속화가 윌리엄 호가스
18세기 영국 풍속화가 윌리엄 호가스(William Hogarth, 1697~1764)는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세공업과 동판화 작업을 하면서 그림을 그렸다. 원래 호가스는 그다지 정치적이지 않았고 야망이 많은 화가였지만, 당시 주식 투기에 미친 영국 런던 사회를 풍자한 그림 《남해 거품 사건(South Sea Bubble)》(1720)을 계기로 사회적 문제를 풍자한 연작 《매춘부의 일대기》(1731~1732)와 《난봉꾼의 일대기》(1734)를 그렸다.
상업 발달과 식민지 정책으로 국가는 부강했지만, 사회의 빈부격차가 심했던 18세기 영국 런던에서 귀족의 방탕한 생활과 허영, 매춘, 평민들의 비참한 삶을 그린 이 그림은 이야기가 이어지는 여러 장으로 그려졌는데, 이는 연속적인 그림으로 문학적 내러티브를 전달하는 혁신적인 방식이었다. 마치 지금 만화의 칸이 이어지면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과 같은 서사 구조를 띠었다.
호가스는 인물의 얼굴과 표정을 표현한 그림 《캐릭터와 캐리커처(Characters and Caricatures)》(1743)를 그렸는데, 이 작품은 연작 《유행에 따른 결혼》(1743)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얼굴 형태, 표정, 성격 등을 규정하기 위해 사전에 작업된 것이다. 무수히 많은 사람의 얼굴이 그려진 이 그림에는 등장인물들 각자의 계급, 계층, 성품 그리고 감정까지도 숨김없이 드러난다. 윌리엄 호가스는 샤를 르 브랭에 이어 인물 표정에서 보편적 감정을 포착하려고 노력했으며, 지금 만화의 칸을 시도한 선배 만화가가 아닐까 한다.
풍자만화의 아버지, 오노레 도미에
18세기 영국은 산업혁명과 자본주의, 식민주의의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면 바다 건너 프랑스는 폭정과 억압으로 혼란한 시기를 경험하면서 혁명을 예고하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혼란한 정국은 풍자만화가 오노레 도미에에게 더 없이 창작과 투쟁의 의지를 불어넣었다. 프랑스 풍자만화의 아버지 오노레 도미에(Honoré Daumier, 1808~1879)는 석판화 작업을 통해 선과 명암 기법을 캐리커처에 적용했는데, 샤를 필리퐁(Charles Philipon)과 함께 풍자잡지 《라 카리카튀르La Cariacture》(1830)와 《르 샤리바리(Le Charivari)》(1832)를 만들었다.
도미에는 이 잡지를 통해 국왕 루이 필립을 식욕이 왕성한 왕 가르강튀아에 비유한 그림 《가르강튀아(Gargantua)》(1831)로 풍자했다. 이 그림은 7월 혁명 이후 샤를 5세에서 루이 필립으로 군주가 바뀌었지만 여전히 필립 왕은 가난한 민중들의 없는 재산마저 먹어 치우고, 대신 아첨하는 정치인과 귀족들에게 그것을 나눠주는 거인 괴물로 묘사됐다.
하지만 도미에의 풍자는 루이 필립 정권이 지나고 나폴레옹 정권에 들어서도 정부의 탄압과 검열 때문에 순탄하지 않았다. 도미에는 벌금으로 인한 가난과 표현 자유의 억압, 감옥살이 등 많은 시련 속에도 정치 캐리커처 창작을 멈추지 않았다. 도미에의 풍자만화는 이후 사회를 풍자하고 패러디하고 고발하는 시사만화를 만드는 기틀을 마련했다.
<한국대학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