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을사년(乙巳年) 대학에 대한 단상(斷想)
한석수 세종공동캠퍼스 이사장(전 KERIS 원장)
개강을 앞둔 캠퍼스가 썰렁하다. 경칩이 내일모레인데 겨울은 물러날 기세를 보이지 않는다. 2025, 을사년(乙巳年)에서 을(乙)은 나무(木), 사(巳)는 불(火)의 기운을 나타내는데 나무는 불을 낳아 성장시킨다는 점에서 변화와 성장, 전환점의 시기로 읽힌다. 올 한 해 우리 대학들은 어떤 변화와 발전적 전환을 맞이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올해는 정부 재정지원사업이 화두가 될 것이다. ‘글로컬대학 30’ 추가 선정이 초미의 관심사로 떠오르고 라이즈(RISE) 사업도 센터 구축과 자치단체별 예산 배정에 따른 사업 공모가 진행될 것이기 때문이다. 정부가 바뀌면 지향하는 정책 방향에 따라 교육재정 투자의 목표와 우선순위가 달라질 수 있겠지만 정부가 바뀔 때마다 대학 재정지원사업의 틀이 너무 쉽게 바뀌면서 현장을 어렵게 한다. 새로운 사업을 추진한다고 기존의 우수한 성과들이 흔적 없이 매몰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리스(RIS) 사업 일환으로 대전·세종·충남 지역에서 추진된 ‘DSC 공유대학 사업’은 하나의 예가 될 수 있겠다. 동 사업으로 24개 참여 대학 간 협력을 통한 초광역 교육모델이 어렵게 구축됐으나 라이즈(RISE) 사업으로 바뀌며 존폐의 기로에 서게 됐다. 아무래도 공유대학 사업이 라이즈 사업으로 확장·발전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이런 사례는 전국에 걸쳐 상당수 존재할 것이다. 정부에서는 이러한 부작용이 발생하지 않도록 기존 우수 사업은 별도 트랙으로 계속 발전해 나갈 수 있게 해야 한다.
대학 등록금 인상도 주요 이슈다.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동결이 시작됐으니 실제 이번 인상은 17년 만이다. 역대 정부는 강 그립으로 대학 등록금 인상의 낙인을 피해왔고 결국 대학들의 불만은 탄핵 정국을 기회로 터지고 만 것이다. 전국 190개 4년제 대학 중 70% 정도인 131개교가 등록금을 인상했다. 9개 대학은 법정 상한인 5.49%까지 인상했다. 등록금 인상은 불가피한 면도 있지만 우리나라 등록금 수준은 OECD 국가 중 상위 그룹에 속하며 제대로 활용되지 않는 대학 적립금에 대한 비판적 여론 또한 높다. 그러므로 대학 재정 운영의 투명성과 효율성을 제고하고 학생들이 국가 재정지원 축소로 피해받는 일은 없도록 해야겠다.
좀 엉뚱할 수 있지만 랑시에르(J. Ranciere)가 《무지한 스승》에서 소개한 자코토(J. Jacotot)의 ‘보편적 가르침’을 제안해본다. 요즘 대학들은 ‘맞춤형’을 강조하는데 역발상으로 무지한 대학, 무지한 스승이 되어 학생들 스스로 자신의 보물을 발견토록 해보는 것은 어떨까. 네덜란드어를 전혀 모르는 자코토 교수는 네덜란드 학생들에게 불어-네덜란드어 번역본을 주고 스스로 공부하게 하여 불어를 성공적으로 학습시킨다. 설명이 없어도 학습이 가능하며 사람들의 지적 능력은 동등하다는 점을 입증한 것이다. 랑시에르는 이를 발전시켜 설명의 논리가 학생을 교사에게 종속시키고 지적 불평등을 고착시킨다며 진정한 교육은 지식 전달이 아니라 배움의 열망과 의지를 자극하는 것이라고 했다. MOOC를 비롯한 각종 오픈 코스웨어 등장으로 시간과 장소의 구애없이 고품질 교육이 가능해진 지금 자기주도적 학습을 위해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 제안은 대학에서 더욱 빛을 발할 수 있지 않을까.
대학에서 노작교육(勞作敎育) 원리도 강조될 필요가 있다. 지·덕·체 균형을 이루도록 학습자 중심의 전인교육이 이뤄져야 한다는 노작교육 사상은 인성교육이 강조되는 제4차 산업혁명 시대 고등교육의 원리가 돼야 하지 않을까. 신체활동과 체험학습을 통해 구체적 삶의 기술을 배우고 자연의 소중함을 익히려는 전통적 노작교육은 대학의 메이커 스페이스로의 전환과도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학 캠퍼스에서 코딩과 인공지능 기술, 디지털 역량과 아날로그적 감성, 인성과 협력적 사고를 고루 함양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깜깜한 밤하늘처럼 고등교육의 미래는 가늠하기 어렵다. 드러커(P. Drucker)의 지적대로 ‘예측’보다는 ‘이미 일어난 미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학령인구 감소, 디지털 전환과 인공지능 발전 등과 관련해 이미 많은 정책적 제안이 범람하고 있다. 필요한 것은 구성원들의 용기와 지혜로운 선택이다. 을사년 기운을 받아 대학이 위기를 기회로 변화와 발전의 전환점을 맞을 수 있기를 바란다. 한편, 대학도 이제 마음챙김(mindfulness)이 필요하다. 목표지향적 행위모드(Doing mode)에서 현재의 삶에 주의를 기울이는 존재모드(Being mode)로 전환도 필요하다. 기자불립(企者不立) 과자불행(跨者不行), 노자의 말씀을 곱씹으며 을사년 뱀의 지혜로 지역 격차, 의대 정원 갈등, 대학구조조정 등 을씨년스러움을 털어내고 대학들이 자신에 맞는 미래를 설계하며 자신의 걸음걸이로 뚜벅뚜벅 걸어갈 수 있으면 좋겠다.
<한국대학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