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뿌리 깊음에 대한 당위와 갈망
조재희 서강대 로욜라국제대학 학장(지식융합미디어학부 교수)
필자는 5년 정도 전부터 식물에 대한 관심이 커졌고, 집에 식물을 조금씩 들이기 시작했다. 키우기가 상대적으로 덜 어렵다는 다육이(다육 식물)를 몇 개 구입한 뒤, 반년이 지나지 않아서 집 베란다를 거의 다 채울 정도로 다육이가 늘어났다. 다육이의 성장 속도는 매우 느리기 때문에, 식물에 대한 관심이 관엽식물로 이동해 ‘필로덴드론’과 ‘안스리움’ 계열의 식물로 집이 채워져 갔다. 이때 알게 된 몇 가지 사실 중 하나는 식물의 성장이 여러 요인들에 의해 결정되며, 특히 식물 크기의 중요한 결정요소는 화분의 크기라는 점이었다. 즉, 뿌리를 얼마나 자유롭게 뻗을 수 있는가는 식물의 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최근 이러한 사실을 분명하게 확인하는 계기가 있었다. 급히 처리할 행정 일이 있어서 교정을 가로지르며 걷던 중, 같은 나무인데 상태가 확연히 다른 두 그루의 황금측백 나무를 보게 되었다. 한 그루는 화분에 심어져 있었고, 다른 한 그루는 땅에 심어져 있었다. 두 그루 황금측백 나무의 차이는 명백했다. 땅에 심어진 나무가 훨씬 풍성하고 열매도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많이 열려 있었다. 나무의 크기와 줄기 및 잎의 상태를 봤을 때, 화분에 심어진 나무의 뿌리는 화분에 갇혀 둥그렇게 말려 있을 가능성이 높다. 뻗어나가고 싶은데 어디로도 나갈 수 없어서 화분에 뿌리가 꽉 들어찬 그런 상태일 수 있다. 흙 속의 양분은 당연히 이미 고갈되어 가고, 바람이 날아다 주는 먼지 속의 양분과 간간이 내리는 빗속에 녹아있는 소량의 양분만이 추가로 공급되고 있을 것이다. 건강하게 줄기를 뻗어 잎을 내고 열매를 맺기 어려운 조건임에 틀림없다. 약한 줄기와 성긴 잎은 당연하게도 한 그루 나무를 약하디 약한 산들바람에도 휘청이고 끌려다니게 만든다. 심지어 몸통에 비해 훨씬 작은 화분에 받쳐진 채 가분수처럼 서 있는 모습은 보기에도 위태롭다.
이만큼 뿌리의 건강한 성장은 식물의 생존과 성장에 너무나도 중요하다. 우리의 선조들 또한 이와 같은 자연의 이치에 주목했고, 〈용비어천가〉의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아 꽃이 좋고 열매가 많다(根深之木, 風亦不扤. 有灼其華, 有蕡其實)”는 구절은 매우 유명하다. 비록 미디어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뿌리 깊은 나무”는 배우 한석규가 세종대왕을 연기했던 방송사 드라마로 기억될 수 있겠지만, 어떠한 영역에서든 뿌리가 깊어질 필요가 있음에 대해서는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뿌리 깊음의 당위라고 볼 수 있다.
최근 연구와 교육에 있어서 필자가 고민이 되는 지점은 이와 맞닿아 있다. 현재 우리가 접하고 있는 변화의 속도는 너무나도 빠르기 때문에,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함은 ‘도태’와 ‘실패’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에 연구와 교육에 있어서도 ‘응용’과 ‘융합’의 중요성이 지속적으로 강조되어 왔다. 기초학문의 필요성에 대해 대놓고 부정하지는 않지만 수많은 이들은 학문 간의 경계를 허물어 융합하고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응용 가능한 학문을 강조 또 강조해 왔다. 그러다 보니, 학문의 영역과 상관없이, 대부분의 단과대학에서 기초분야 연구와 교육에 대한 관심 및 지원은 급격히 감소해 왔다. 인문·사회분야에서 뿐만 아니라, 자연·공과대학에서도 기초분야에 대한 국고 및 학내 지원은 지속적으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기초학문의 튼튼한 뿌리가 없다면 융합과 응용으로 줄기를 뻗고 열매를 맺는 것은 불가능하다. 기초 체력이 없으면 아무리 탁월한 기술을 가졌더라도 운동 경기에서 승리할 수 없듯이, 단기적인 관심과 쓸모에만 기민하게 대응하다 보면 금세 지쳐 주저앉게 됨을 새길 필요가 있다. 이러한 주장은 절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다만, 거친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고 풍성하게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교육·연구 환경 조성을 위한 목소리에 작게나마 울림을 더하고 싶다.
<한국대학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