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학협력이 미래다] 정년 70세 보장 초빙 ‘파격’… 가천대, 연구중심대학 시험대에
이원준 고려대 교수, 가천 AI·컴퓨팅연구원 초대 원장 정년연장 계약, 국내 최초 현역 석학 영입 모델 ‘부각’ 전문가 “파격적 행보… 현 고등교육의 불가피한 흐름”
[한국대학신문 김의진 기자] 가천대가 국내 대학들의 인사 제도의 관행을 흔드는 선택을 했다. 지난 16일 개원한 가천 AI·컴퓨팅연구원(GAIC) 초대 원장으로 이원준 고려대 교수를 영입하면서다. 가천대는 이원준 교수에게 정년을 70세까지 보장하는 조건을 내걸었다. 교육계에선 다른 대학의 현역 교수를 초빙 단계부터 장기적인 연구 활동을 제도적으로 보장한 사례로서 전례가 드문 일이란 반응이다. 가천대의 파격적 행보가 향후 국내 대학의 연구중심대학 전략에 변화를 불러올지에도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17일 교육계에 따르면 가천대가 지난 16일 개원한 가천 AI·컴퓨팅연구원(이하 GAIC) 초대원장으로 영입된 이원준 교수는 고려대에서 컴퓨터학과, 정보보호대학원 교수로, 무선통신·클라우드·네트워크·보안 분야에서 세계적 업적을 쌓은 학자다. 한국과학기술한림원·공학한림원 정회원, 한국정보과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가천대는 이 교수를 GAIC 초대원장으로 초빙하면서 정년을 70세까지 보장했다. 교육계에선 가천대처럼 현역 석학을 외부에서 데려오면서 정년 보장을 계약 조건으로 내세운 건 매우 이례적이란 평가가 나온다.
이길여 가천대 총장은 이날 본지와 통화에서 “연구중심대학 도약을 위한 전략”이라고 강조했다. 지난 16일 개원식에서는 “반도체·배터리·바이오 등 핵심 분야를 인공지능(AI)과 전략적으로 융합해 글로벌 연구 허브로 성장하겠다”며 “이원준 교수 초빙은 상징적 출발점”이라고도 했다.
국내 대학교수의 법정 정년은 현행 ‘교육공무원법’에 따라 만 65세로 정하고 있다. 물론 국내 일부 대학들도 우수 교수의 연구 지속을 위해 제도를 개편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서울대는 유홍림 총장이 취임한 이후 제도혁신위원회를 조직하고 여기에서 최근 정년 후에도 최대 70세까지 연구·교육을 허용하는 ‘정년 후 교수 제도’를 검토 중이다. 종신교수, 연구·교육 정년 후 교수 등 트랙을 나누고 인건비와 연구 공간을 지원하는 방식이다.
포항공대(POSTECH)도 올해 7월 국내 최초로 ‘정년연장 조기결정 제도’를 도입했다. 만 50세 전후로 우수 교수를 선발해 정년을 미리 70세로 확정하는 식이다. 교수가 연구에 몰입할 수 있도록 정년을 보장하겠단 취지에서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 역시 70세까지 연구·강의를 할 수 있는 ‘정년 후 교수’를 재임용 형태로 운영 중이다.
다만 대학 현장에선 서울대 등 주요 대학들의 시도는 대부분 내부 교수를 대상으로 한 사례들이 많아 이번 가천대처럼 외부 교수를 초빙하며 정년을 보장한 방식은 드물다고 설명한다. 교육계가 가천대의 이원준 교수 초빙을 관심 있게 지켜보는 것도 이 이유에서다.
이기우 전 교육부 차관은 본지 통화에서 “우리나라처럼 법정 정년이 엄격한 상황에서 외부 현역 교수를 영입하며 정년 70세 보장을 조건으로 내건 선택은 어디에도 없는 이례적 모델”이라고 평가했다.
이 전 차관은 이어 “파격적이지만 또한 한편으론 국내 고등교육이 선택할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흐름으로도 볼 수 있다”며 “AI·컴퓨팅은 세계적으로 인력 쟁탈전이 벌어지고 있는 분야다. 정년 65세에 묶여 세계적 석학들이 해외로 나가는 상황을 막으려면 (가천대 정도의) 파격 조건이 현실적으로 필요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최석식 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차관도 이날 본지에 “국내 대학의 인사제도는 지나치게 경직돼 있는 경향이 있다”며 “연구자의 생산성이 오히려 정년 직후 최고조에 달하는 경우가 많다. (가천대 사례는) 제도적 상상력을 보여준 시도”라고 평가했다.
가천대는 이번 GAIC 설립을 계기로 교육에서 연구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를 본격적으로 만들겠다는 계획이다. 이미 가천대는 지난 2020년 국내 최초로 AI학과를 신설하고 모든 학생에게 AI 교양 수업을 의무화했으며 국내에서 처음으로 AI인문대학을 세우는 등 AI 교육 혁신을 앞장서 추진한 바 있다. 향후 교육 성과를 토대로 연구 분야를 강화해 세계 대학·연구소와 함께하는 국제 공동연구센터를 세우고 IEEE급 국제학술대회와 글로벌 AI·컴퓨팅 심포지엄을 열어 글로벌 연구 거점으로 도약하겠단 구상이다.
이길여 총장은 “정년 보장 초빙은 가천대가 세계적 연구자들을 장기적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제도적 환경을 갖추는 실험”이라며 “향후 추가 석학 영입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원준 원장 역시 취임사에서 “AI는 이제 하나의 특정 기술이 아니라 모든 산업과 학문을 연결하는 핵심 역할을 하고 있다”며 “앞으로 가천대에서 AI와 다른 분야를 아우르는 융합 연구를 본격적으로 추진해 10년 안에 세계적인 연구 성과를 내겠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례가 다른 대학에도 큰 영향을 줄 것으로 보고 있다. 국내 대학들이 우수한 연구자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가천대처럼 파격적인 조건을 도입할 수밖에 없다는 전망이다. 특히 반도체, 바이오, 양자컴퓨팅 같은 국가 전략산업 분야에서는 석학 영입 수요가 더 커질 수 있다는 분석이다.
하지만 풀어야 할 과제도 많다. 정년 보장이 현행 법정 정년 규정과 부딪힐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립대는 정관이나 학칙을 고쳐 해결할 수 있지만 국립대의 경우 법 개정이 필요하다.
장기간 계약을 유지하려면 인건비와 연구비 부담을 버틸 수 있어야 하는 만큼 재정 문제도 큰 숙제다. 또 성과 평가와 계약 조건을 어떻게 설계하느냐도 관건이다.
일부에선 젊은 연구자 세대와의 균형 문제를 우려하는 시각도 존재한다. 서울 소재의 한 사립대 교수협의회장은 본지에 “정년 보장이 특정 석학에게 집중되면 젊은 연구자들이 설 자리, 채용 기회가 줄어들 수 있다”며 “장기적으로 신진 연구자 채용과 균형감 있는 세대 교체를 어떻게 풀지 제도적 설계가 필요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교육계에선 가천대가 국내 대학들의 기존 틀을 깬 것은 분명하다고 입을 모은다. 특히 연구중심대학으로 도약하려는 강한 의지와 함께 이제까지 경직돼왔던 국내 대학의 정년제·석좌제 구조를 흔드는 실험이라는 시각에서 의미가 크다는 평가다.
이 전 차관은 “관전 포인트는 이 실험적 시도가 가천대 전체의 연구 역량 강화와 글로벌 협력 성과로 이어질 수 있을지에 있다”며 “다른 대학들이 이를 어떻게 수용, 변형할 수 있을지도 지켜보면 좋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정년 보장형 초빙은 국내 고등교육 제도의 경직성을 비트는 사실상 첫 사례로 기록될 것”이라면서도 “다만 이 선택이 연구중심대학으로 가는 돌파구나 될지, 아니면 일회성 파격 이벤트로 끝날지는 앞으로 10년간 성과가 말해줄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