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 대한민국] ‘국립대학법 제정’과 ‘서울대 10개 만들기’
임경호 전국 국·공립대학교 총장협의회장(국립공주대 총장)
대한민국의 고등교육은 지금 거대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수도권에 대학과 인재와 재정이 집중되면서 대학 서열 체제는 더욱 굳어지는 실정이다. 매년 수십만 명의 학생들이 더 나은 교육 기회와 취업 가능성을 찾아 수도권으로 몰려들고, 그로 인해 지역 대학은 정원 미달과 재정 악화로 퇴로 없는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지역 대학의 위기는 곧 지역사회 인구 소멸과 산업 경쟁력 약화로 직결되고 결국 이것은 국가 생존전략의 문제로도 연결된다.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최근 정부가 국정과제로 제시한 ‘서울대 10개 만들기’는 단순히 서울대 수준의 재정 지원을 통한 S1+S9 개념을 넘어, 대한민국 고등교육의 체질을 근본적으로 바꾸겠다는 시대적 전환 선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과제가 성공적으로 실현되기 위해서는 그 대상인 국립대학의 전반적 체질 개선이 함께 병행되어야 하며 국립대학법 제정이라는 법과 제도를 통한 실질적 기반 마련이 그 해결책이 될 것이다.
수도권 중심주의와 대학 서열 구조의 한계
오랫동안 우리 사회의 대학 구조는 ‘수도권 중심’이라는 불문율 속에 운영됐다. 고교 졸업생과 학부모가 입시 전략을 짤 때 ‘서울 소재 대학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기준이 되고, 오직 소수의 대학만이 국가 지원과 사회적 명성을 독점해 왔다. 결과적으로, 지역 대학은 ‘듣보잡’ 또는 ‘2류’, ‘3류’로 불리며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경쟁하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구조가 국가 경쟁력의 저하로 이어진다는 데 있다. 수도권으로만 인재와 자원이 몰리다 보니, 지역 산업은 이를 뒷받침할 고급 인력이 턱없이 부족한 실정에 내몰리고 결국 지역 산업 기반의 약화에 이어 국가 전체의 산업 전환 속도를 더디게 만들고 있다. 수도권 중심의 교육 구조에서 벗어나 지역 대학이 지역과 국가를 동시에 지탱하는 역할을 강화하지 않고서는 대한민국이 직면한 저출산, 지역소멸, 산업 경쟁력 저하의 위기를 넘어설 수 없음이 자명하다.
지역 특성화 연구중심대학의 필요성
‘서울대 10개 만들기’는 대한민국 곳곳에 존재하는 국립대학이 지역과 국가의 전략적 과제를 해결하는 연구중심대학으로 성장하도록 하는 국가적 프로젝트가 본질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예를 들어, 강원권 국립대학은 기후위기 대응, 산림·환경, 바이오 헬스케어 분야에서, 충청권 대학은 KAIST와 연구기관이 밀집한 대덕특구와 연계해 첨단공학, AI, 반도체, 모빌리티 분야에서 글로벌 거점을 형성하고, 전라권 대학은 농생명·바이오, 해양수산 산업과 맞물려 지역산업을 견인하며, 경상권 대학은 제조업 및 에너지 산업과 연계해 글로벌 공급망과 우주항공 분야의 무게 중심을 맡을 수 있다. 이처럼 국립대학을 전국의 산업·연구 클러스터와 긴밀하게 연결해 육성한다면, 각 대학은 단순한 교육기관을 넘어 지역과 국가 혁신의 엔진으로 기능할 것이다.
국립대학법이 필요한 이유
서울대가 오늘날 국가적 대표 중심대학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순한 ‘역량’ 때문은 아니고 인재의 독점, 안정적 재정 지원과 제도적 장치가 꾸준히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수도권에 대한 공간 권력을 나누기 위해 지역의 주요 도시를 중심으로 균형발전에 지대한 역할을 해온 국립대학은 지금의 법·제도 체계 속에서 대부분 서울대 수준의 자율성과 재정 지원을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국립대학법은 이러한 현실을 근본적으로 전환하고 지방국립대학의 전반적인 경쟁력 제고를 통해 ‘서울대 10개 만들기’가 풍성한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기름진 텃밭을 조성하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국립대학법으로 다음과 같은 국가적 책무성을 강화해야 한다.
국립대학의 법적 위상, 헌법적 가치에 걸맞게 명확히 보장
대학별 특성과 지역 연계 발전 전략, 국가 차원에서 공식화
교육비·연구비에 대한 안정적이고 동등한 국가책임제 확립
지방국립대학에 인재를 유인하고, 기초적 연구환경을 조속히 제공하기 위한 국립대학법이 단순한 선언적 법안이 아니라 실효성을 가지려면 다음과 같은 구체적 조치들이 포함되어야 한다.
우선 국립대학의 법적 지위를 확립하고 조직․인사․재정에 자율 운영이 가능토록 지원해야 한다. 그 이유는 「헌법」에서 규정하는 “학문의 자유(제22조)”와 “대학의 자율성(제31조)” 조항을 구체화해야 할 입법 의무가 국가에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국립대학은 법률이 아닌 「국립학교설치령(대통령령)」에 근거하여 운영되었고, 교육부 소속 행정기관 정도의 위상으로 조직, 인사, 재정 운용 등에 상당한 제약이 가해져 대학이 사회 변화에 탄력적으로 대응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더불어 현행 「고등교육법」은 국립대학에 대한 별도의 규정 없이 사립대학 등과 혼합하여 규정하고 있는바, 국립대학과 사립대학의 역할이 다름을 고려할 때 별도 법률로써 국립대학의 기능과 역할을 규정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국립대학 재정지원 및 확대에 대한 국가의 책무를 명확히 하고, 재정 운용에서의 대학 자율성을 제고하기 위해 목적별 교부가 아닌 총액 교부를 명문화할 필요가 있다. 이런 법적 뒷받침으로 모든 국립대 학생에게 서울대와 유사한 수준의 교육비 지원은 기회의 평등을 넘어, 연구와 교육의 질적 격차를 줄이는 핵심 장치가 될 것이다.
지방에 국립대 말고도 경쟁력 있는 사립대학들도 있는데 왜 국립대만 지원하느냐는 문제 제기가 있을 수 있지만, 국립대를 우선하여 대학지원체계가 성립되면 사립대학에 대한 후속 작업도 보다 선명하게 줄기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한편, 각 국립대학이 지역 핵심 산업 분야와 직결된 학문·연구 체계를 운영하도록 법률에 명시하고, ‘지역 산업-대학-정부’ 삼각 협력모델의 핵심 축이 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유인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하면 국립대학이 지역혁신도시 건설, 첨단산업 클러스터 조성 등 국가 프로젝트의 중심축으로 기능하면서 국가 균형발전을 선도할 수 있다. 지난 정부에서 추진했던 글로컬30과 RISE 사업은 국립대학간의 통합을 이끌면서 지역의 대학들이 자체 혁신 방안을 수립하고 해당 지역의 발전목표와 궤를 같이할 수 있도록 묶는 작업이 일정 부분 이루어졌다. 국립대학 간 또는 국-공립대학 간 통합을 통해 대학의 경쟁력 강화 및 국가 균형발전, 지역의 지속가능발전 등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이재명 정부에서는 국립대학법 제정을 통해 통합에 대한 법적 근거 및 지방자치단체의 국립대학 지원방안을 보다 구체적으로 마련할 필요가 있다. 지방자치단체가 대학과 협력하면서도 자치의 가치와 대학의 학문적 자유를 훼손하지 않도록 상호 존중하고 수평적으로 협력하는 관계 설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서울대 10개, 그리고 국가 혁신
국립대학법 제정은 ‘서울대 10개 만들기’라는 국정과제를 넘어, 대한민국 교육혁신의 출발점이며 국가 균형 발전의 핵심 동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 국립대의 교육 및 연구 경쟁력 강화를 통해 국내 대학의 국제적 위상을 제고하면, 우수한 외국인 유학생 유치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며, 의대 쏠림을 해소하고 AI·첨단산업 분야의 우수한 학문후속세대 양성 및 고급 연구인력 확보를 통해 수요가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는 첨단분야 인재를 집중육성할 수 있다. 아울러‘서울대 아니면 수도권 사립’이라는 대학 선택 경향성을 완화하고 국립대가 지역의 경제·사회·복지의 플랫폼으로 기능할 뿐만 아니라, 지역 사립대를 포함한 전체 고등교육의 구심점 역할을 함으로써 대학과 지역이 공동 성장할 수 있는 단단한 기반을 형성하게 될 것이다. 국립대학법 제정을 통해 대한민국 고등교육의 새로운 100년을 여는 초석이 만들어지길 바란다.
<한국대학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