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시 지옥과 ‘가짜뉴스’에 갇힌 韓 청소년… “AI에 고민 털고, 사회 루머 75% 사실로 믿어”
‘진로·진학’ 압박 속 고3 92.8% 고통, 중학생 '외모·친구', 고등학생 '마음건강·경제' 고민 학교상담실 외면하고 생성형 AI 찾는 학생들, 루머 4명 중 3명 “사실” 인식 심각 경쟁 교육 개혁-학급당 전문상담교사 배치-미디어 리터러시 의무화 ‘5대 정책’ 시급
[한국대학신문 백두산 기자] 대한민국 청소년들의 정신 건강과 삶의 안전망이 붕괴 직전에 놓였다는 경고음이 울리고 있다. 입시 압박과 무한 경쟁에 짓눌린 학생들이 제도권의 상담 대신 생성형 AI에 고민을 털어놓고 있으며, 대다수가 검증되지 않은 사회적 루머를 사실로 믿는 충격적인 실태가 드러났다. 이들의 삶을 옥죄는 구조적 고통과 디지털 환경의 위험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지표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는 제96주년 ‘학생의 날’을 기념해 발표한 ‘중고등학생 고민과 사회 인식 조사’에서 이같은 결과가 나왔다고 3일 밝혔다. 전교조는 전국의 중고등학생 1556명을 대상으로 2025년 10월 22일부터 29일까지 조사를 진행했으며, 95% 신뢰 수준에 오차범위는 ±2.48%p이다.
■ 고3의 비명, 학업 스트레스 임계점을 넘다 = 청소년의 고민 1위는 예상대로 ‘진로·진학(83.7%)’이 압도적이었다. 문제는 이 고민이 학년이 올라갈수록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며 심화된다는 점이다. 중학교 1학년은 65.6%가 진로·진학을 고민했으나, 고등학교 3학년에 이르면 그 비율이 92.8%까지 치솟아 입시 중심 사회 구조가 청소년의 일상적 스트레스 요인임을 명확히 보여줬다.
학년별 고민의 양상 변화도 주목된다. 중학생은 ‘친구관계(42.2%)’와 ‘외모(38.4%)’ 등 또래 인정과 자아정체성 형성기의 사회적 민감성에 집중됐으나, 고등학생은 학업 압박에 따른 내면의 문제, 즉 ‘마음건강(29.6%)’과 현실적 생존 문제인 ‘경제적 문제(29.4%)’를 주요 고민으로 꼽았다.
주관식 응답에서는 청소년들이 체감하는 복합적인 스트레스의 강도가 드러났다. “수행평가와 시험, 인간관계와 학원 숙제가 겹쳐 밤을 새우는 날이 많다”는 구체적인 피로감 호소와 함께, “다 피곤하고 쉬고 싶다”는 절망적인 응답은 이미 많은 학생의 정신 건강이 임계점에 도달했음을 시사한다.
특히, 학생 10명 중 약 3명(28.4%)은 주변으로부터 자신의 고민에 대해 충분히 ‘공감받고 있지 못하다’고 응답했다. 이는 정서적 고립과 관계적 단절을 겪는 청소년이 상당수 존재한다는 방증으로, 이들은 ‘도움을 요청하지 못하거나(20.1%)’ ‘고민 해결 방법을 모르는(37.6%)’ 상태와 연결돼 절망감에 빠질 위험이 높은 것으로 분석됐다. 전교조는 “학교 안팎의 심리적 안전망이 충분히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신호”라고 진단했다.
■ 상담 기피와 루머의 늪… 신뢰 붕괴와 디지털 고립 = 학생들은 고립된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제도화된 ‘학교 상담실’ 대신 새로운 디지털 매체에 의존하는 경향을 보였다. 고민 상담 시
‘생성형 AI(ChatGPT 등)’를 이용한다는 응답(15.5%)이 학교상담실 이용률(5.1%)보다 3배 이상 높게 나타났다. 교사에게 상담하는 비율 역시 14.9%에 불과했다. 이는 학교 내 상담 시스템의 접근성이 낮거나, 상담 내용의 비밀 보장이 어렵다는 인식에 따른 ‘낙인 효과’가 고착화됐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최근 1년 내 정신건강의학과나 상담기관 방문 경험이 없는 학생 중 23.6%는 ‘가고 싶었지만 못 갔다’고 답했다. 특히 고3은 이 비율이 30.9%까지 증가했다. 시간, 비용, 낙인 등 여러 현실적 장벽이 청소년의 마음 건강 회복을 막고 있는 것이다.
더 심각한 것은 청소년들의 정보 소비 행태가 검증되지 않은 정보에 대한 취약성을 극대화한다는 점이다. 사회문제나 뉴스를 접하는 주요 경로 1위는 유튜브(76.1%)였으며, SNS(69.9%)가 뒤를 이었다. 이는 청소년들이 알고리즘이 제공하는 영상 중심의 환경에 갇혀 있음을 의미한다.
정보의 사실 여부를 확인할 때도 34.1%가 ‘해당 정보에 달린 다른 사람들의 댓글/반응(사회적 검증)’을 살펴본다고 답했다. 직접 포털 검색을 통해 다른 언론사의 기사를 찾아본다는 응답(28.9%)보다 높아, 다수 의견을 진실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했다. 또한 18.3%는 아예 사실 확인을 하지 않고 넘긴다고 답해 비판적 정보 해석 능력의 격차도 확인됐다.
이러한 취약성은 ‘중국인 무비자 입국 장기매매설’ 루머 인식 조사에서 충격적인 수치로 드러났다. 중고생의 80.3%가 이 루머를 접했으며, 그중 무려 74.9%가 이 내용을 ‘사실’이라고 인식한 것으로 나타났다. 루머는 인스타그램, 유튜브, 틱톡 등 숏폼 영상 플랫폼을 통해 확산됐는데, 이는 시각적 자극과 반복 노출이 확신을 강화하는 ‘알고리즘 편향’의 위험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 구조적 압박에서 비롯된 미래 불안 = 청소년들이 느끼는 사회적 압박과 불안의 근원에는 ‘성과 중심’의 구조적 강요가 자리 잡고 있다. 응답 학생의 70.3%가 “좋은 대학에 가야 성공한다”는 사회적 압박과 경쟁 시스템을 가장 큰 부담으로 느꼈다. 절반 이상인 52.9%는 “돈을 많이 벌어야 행복하다”는 물질적 성공에 대한 사회적 강요를 호소했다.
주관식 응답에서는 “무엇이든 경쟁해야 인정받는다”, “사회가 정한 기준에 맞춰야만 안전하다”는 비판적 인식이 확인됐다. 청소년들은 이 성과 중심 사회 속에서 자율성과 정체성의 혼란을 동시에 겪고 있는 것이다.
개인의 불안을 넘어 사회 전체의 현상에 대한 불안감도 높았다. 청소년들이 불안을 느끼는 사회 현상 1위는 ‘묻지마·강력범죄(50.9%)’였으며, ‘정치적 갈등과 사회분열(35.0%)’, ‘전쟁·국가안보(32.8%)’ 순으로 나타났다. 이는 청소년들이 일상적 안전 위협과 거시적 국가 위협을 동시에 체감하며 전방위적인 불안에 노출돼 있음을 보여준다.
■ 전교조, ‘학생들 삶의 회복과 성장 위한 5대 정책 방향’ 제시 = 설문에서 나타난 청소년들의 절규는 현행 교육 및 사회 시스템의 근본적인 전환을 요구한다. 학생들은 자신의 삶을 옥죄는 문제 해결을 위해 압도적으로 ‘경쟁 중심 교육 제도 개혁’을 가장 시급한 과제로 꼽았으며, 구체적으로 “공부 압박을 줄여달라”, “고교학점제 폐지”, “휴식과 수면의 권리를 보장해달라(9시 등교)”는 요구를 쏟아냈다. 또한, 정서적 지원망으로서 “진심으로 이야기를 들어줄 어른이 필요하다”, “우울증 상담치료 같은 것을 쉽게 접할 수 있으면 좋을 것 같다”며 신뢰 기반의 지원을 강조했다.
이에 전교조는 이번 조사 결과에 대해 ‘중·고등학생 삶의 회복과 성장을 위한 5대 정책 방향’을 제시하고, 심각한 위기에 직면한 학생들을 구제하기 위한 교육 당국과 사회의 즉각적인 개입을 촉구했다. 전교조가 제시한 5대 정책은 크게 교육 시스템 개혁, 정서 안전망 강화, 학교 안전 확보 및 인식 개선이라는 세 가지 축을 중심으로 구체화된다.
교육 시스템 및 경쟁 구조의 근본적 개혁을 위해 전교조는 학생들의 압도적인 고민인 진로·진학 문제의 근본적 해결책으로 고교학점제 폐지와 내신 5등급제(상대평가)의 재검토 및 절대평가 전환을 최우선 과제로 요구했다.
또한 경쟁 중심 교육에서 벗어나 삶과 행복을 가르치는 교육으로 전환하고, 예체능 및 직업체험 등 다양한 진로 탐색 프로그램을 확대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와 더불어 학생들의 수면권과 휴식권을 보장하기 위해 수행평가 및 시험 부담을 완화하고 9시 이후 등교를 제도화할 것을 촉구했다.
두 번째로 정서적 심리 안전망 획기적 강화를 위해 학교 상담 시스템의 획기적인 개편이 시급하다고 진단하며, ‘1학교 1전문상담교사’ 수준을 넘어 학급 수에 비례한 전문상담교사 배치를 법제화하고 상담 내용 비밀보장을 통한 ‘학생 상담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해 상담 기능을 위기 개입에서 보편적 예방 중심으로 전환할 것을 요구했다. 아울러 1차 안전망인 교사의 역할 회복을 위해 행정 업무 경감과 민원 대응 시스템 개선을 통한 교사의 '들을 수 있는 시간' 확보를 촉구했다.
마지막으로 학교 폭력 근절 및 사회적 인식 개선을 위해 청소년 사회불안 요인인 학교폭력 문제 해결 필요성을 강조했다. 학교장의 총괄 책임을 강화하고 전담기구의 권한을 실질화하며 교사가 학폭 의심 상황에 즉시 개입하고 피해 학생을 신속히 분리 조치할 수 있도록 권한과 시스템을 강화할 것을 주장했다. 이와 함께 청소년 발달 이해와 감정 공감, 성공·행복 인식 개선 등을 내용으로 하는 부모 교육을 의무화해 가정 내 정서적 압박을 줄여야 한다고 제언했다.
진수영 전교조 참교육실장은 “이번 조사 결과를 보면 중·고등학생들의 우울, 불안, 학업 부담 등 정신건강이 이미 위험 수위에 올라와 있다고 경고한다”며 “사회와 교육체제가 학생들을 아프게 만들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진 실장은 “전문상담교사 배치를 확대하고, 학교 안팎 통합지원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며 “우리 교사들은 아이들의 힘듦을 외면하지 않겠다. 무거운 책임감을 갖고 교실에서부터 아이들의 목소리를 귀 기울이며 학생을 살리는 교육을 만들기 위해 행동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