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애벌레 껍질을 깨고 나아가는 대한민국 교육의 미래
이승섭 카이스트(KAIST) 교수
2020년 영국 BBC 방송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South Korea: The life-changing exam that won’t stop for a pandemic.’ 팬데믹 상황에서 치러진 대학수능시험 기사였는데, 필자의 마음을 무겁게 한 것은 ‘life-changing exam’이라는 기사 제목이다. 우리나라에서 대학입시는 인생을 바꾼다는 믿음이 있고 실제로 바꾸기도 한다. 하지만 필자는 그로 인해 우리 아이들이 억울하고 학부모와 사회는 헛고생을 하며 국가와 기업 그리고 대학은 경쟁력을 잃고 있다고 주장한다.
대학입시의 변화 없이는 중·고등학교 교육이 결코 변할 수 없다는 단순 진리와 함께, 교육이 파행으로 흐르고 대학입시가 인생을 바꾸는 시험으로 탈바꿈하게 된 이유는 ‘대학제도의 모순’에 있다. 학벌사회와 서열화된 대학, 입학이 졸업을 보장하는 현 대학제도 속에서 대학입시는 충분히 사회의 신분 순위를 결정하는, 정해진 목적지까지 확실하게 인도하는 기차의 승차권과 같다고 여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 우리 사회에는 대학에 대한 환상과 한이 있었던 시절, 그래서 교육 내용보다 대학 이름만으로 많은 것들이 결정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대학 존립 그 자체에 대한 고심이 깊어지고 새로운 대학에 대한 다양한 시도들이 모색되는 시점까지, 우리 사회가 학벌사회를 논하고 대학입시를 인생을 바꾸는 시험으로 간주하는 것은 심히 시대착오적이다.
곤충은 애벌레에서 성충이 되기까지 몇 번의 탈피를 한다. 애벌레의 껍질은 단단한 재질로 연약한 애벌레를 보호하지만 애벌레의 몸집이 커지게 되면 오히려 성장을 방해하고 애벌레의 생명까지 위태롭게 한다. 오늘날 우리 교육은 애벌레의 낡고 단단한 껍질과 같다. 우리나라는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짧은 기간에 경제발전과 민주주의를 동시에 이룩했는데, 그 성공의 가장 큰 원동력이 교육이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사회는 탈피를 못한 애벌레와 같이 낡은 교육제도의 두꺼운 껍질 속에서 숨 막히는 고통을 겪고 있다. 참고로 유교 교육은 400년 동안 조선 시대를 지탱하는 근간이었으나 19세기 말 두꺼운 껍질이 되었고, 탈피를 못한 애벌레 조선은 먼저 껍질을 깨고 성충이 된 일본에 잡혀 먹혀 식민지가 되었다.
필자가 주장하는 교육개혁의 핵심은 ‘대학 서열화 탈피와 차별화’다. 대학교육이 부실했던 과거 시절에는 정상적인 교육의 유무 혹은 수준에 따라 우열이 갈라지고 서열화가 불가피했을 수도 있었으나, 오늘날 대부분의 대학들이 제자리를 잡은 현 상황에서는 각 대학들의 특성에 맞도록 차별화하는 전략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연구중심대학, 교육중심대학, 혼합형 대학 등으로.
20여 년 전 필자는 관광버스를 타고 남원을 지난 적이 있었다. 버스는 잠시 춘향전의 배경인 광한루에 정차했는데, 처음 방문한 광한루에서 기념품을 꼭 사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들어가 본 가게들의 기념품들은 모두 비슷했고, 가게들을 오가면서 가격을 비교하다 시간이 흘러 결국 아무런 기념품도 사지 못하고 남원을 떠나게 됐다. 만약 가게들이 각각 티셔츠와 목각 장식 혹은 인형 및 잡화 등으로 차별화를 했으면 제대로 된 가격으로 원하는 기념품들을 쉽게 판매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서열화된 대학은 가격 외에는 차별성을 주지 못하는 기념품 가게들과 같다. 더욱 안타까운 점은 용도와 디자인은 제쳐 둔 채 가격만으로 판단되는 기념품과 같이 점수와 서열만으로 평가되는 대학들이다. 서열화된 대학 제도 속에서 대학들은 내신등급과 수능점수에 의해 최상위 대학에서 최하위 대학까지 한 줄로 세워지고, 각 대학 안에서는 다시 최상위에서 최하위 학과로 한 줄이 또 세워진다.
자신의 꿈과 적성과는 관계없이 점수만으로 선택된 학교와 학과에 자부심과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최상위 대학의 최상위 학과조차도 높은 점수만으로만 결정됐다면 긴 인생 길에서 진정 자신의 직업에 만족하며 보람과 자긍심을 갖기는 힘들다. 더구나 들어갈 때는 단지 높은 입학점수란 이유로 들어갔는데 나중에 학과 점수가 떨어진다면 그 또한 황당하고 억울한 상황이 될 수 있다.
한편, 정부와 사회는 집중과 선택 혹은 공정성을 이유로 서열이 높은 대학에 더 많은 지원을 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할 수 있지만 국가적으로 볼 때 그것은 잘못된 선택이 될 수 있다. 교육의 목적이 개인 혹은 대학의 경쟁력 향상을 너머 사회 전체의 경쟁력을 높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대학은 차별화되어 각 대학이 갖고 있는 장점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발전해야 한다. 오늘날 세상은 AI와 새로운 지식으로 천지개벽 되고, 수명 또한 길어져 한 번의 대학교육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사회는 아직도 18살 학생들이 치르는 대학입시가 인생을 결정짓는다는 과거 세상에 머물러 있다.
<한국대학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