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생각] “선택권보다 중요한 건 사유의 시간”… 한민정 서울시립대 교수, 고교학점·무전공제가 놓친 것은 무엇인가
“선택권 확대의 그늘… 고교학점제, 입시 구조 속 또 다른 경쟁으로 작동” “진로교육은 삶을 성찰하는 문화… 사유의 근육을 키우는 교육으로 확장돼야”
[한국대학신문 윤채빈 기자] 고교학점제와 무전공제의 시행이 본격화되면서, 학생의 ‘선택권 확대’가 교육의 새로운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하지만 대학 현장에서는 “제도가 선택의 자유를 주기보다 새로운 불안을 낳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민정 서울시립대학교 인재개발실 진로교육 객원교수는 “진짜 선택권은 제도가 아니라 사유의 시간에서 비롯된다”며 “진로교육은 ‘어떤 인간으로 살아갈 것인가’를 묻는 문화적 교육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했다.
본지는 한 교수에게 고교학점제·무전공제의 한계와 진로교육의 새로운 방향을 들어봤다.
- 최근 고교학점제 시행과 관련해 학교 현장에서 여러 어려움이 제기되고 있다. 진로교육 교수가 보기에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가.
“고교학점제가 학생의 과목 선택권을 확대하겠다는 취지로 도입됐지만, 실제로는 입시 구조 안에서 또 다른 경쟁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동하고 있다. 학생들은 “배우고 싶은 과목”보다 “입시에 도움이 되는 과목”을 선택하면서, 고교학점제는 또다른 평가 수단으로 변질되고 있다. 제도가 표방한 ‘자기주도적 학습’은 현실에서 ‘자기검증적 선택’이 된 셈이다. 교사들 역시 행정 업무와 수업 설계를 동시에 감당해야 하는 이중 부담에 놓여 있고, 학교는 ‘선택형 교육과정’을 운영할 인력·시간·시설적 여건을 충분히 갖추지 못한 상황이다. 고교학점제는 혁신을 표방하지만, 제대로 된 준비 없이 상위 정책 중심으로 추진되고 있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다.”
- ‘무전공제도’ 역시 학생의 선택권 확대를 위한 제도다. 진로교육의 관점에서 어떻게 평가하나.
“취지 자체는 매우 긍정적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제도가 주는 자유보다 불확실성의 부담이 더 크게 작동한다. 학생들이 “무엇이 나에게 맞는가?”보다 “어떤 선택이 유리할까?”를 고민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무전공제는 탐색의 기회가 아니라 또 다른 형태의 경쟁으로 이어지고 있다.
진로교육의 핵심은 ‘선택의 폭’이 아니라 ‘선택의 근거’를 형성하는 과정이다. 핀란드 알토대나 미국 미네르바 스쿨처럼, 학생이 전공을 정하기 전 자신을 실험적으로 탐색할 수 있도록 제도적 여백과 피드백의 문화를 마련해야 한다. 실패할 자유, 다시 선택할 여유가 주어질 때 비로소 무전공제가 진정한 진로교육 제도로 기능할 수 있다.”
- 고교학점제·무전공제가 실질적인 진로 탐색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어떤 개선이 필요하다고 보는가.
“고교학점제나 무전공제가 진정한 의미를 가지려면, 학생이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탐색할 수 있는 시간과 사유의 여백이 보장돼야 한다. 지금처럼 제도가 ‘선택권 확대’를 내세우면서도 실제로는 ‘평가의 근거’로 작동하는 한, 학생의 탐색은 제도 안에서 길을 잃을 수밖에 없다. 이를 위해선 제도의 근간을 이루는 교육철학의 재정립이 필요하다.
교사의 업무 여건 개선과 행정의 혁신은 병행돼야 하며, 교육행정은 단순한 관리 기능을 넘어 교육과정 설계와 운영을 전문적으로 지원하는 체계로 바뀌어야 한다. 그 위에서야 비로소 ‘탐색의 교육’이 제도 속에 자리 잡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대학 1학년의 교양과정이 단순히 ‘기초학문 이수 기간’이 아니라, 학생들이 자신의 문제의식과 관심사를 탐색하는 프로그램으로 운영된다면 제도의 취지가 살아날 것이다. 스탠퍼드대의 ‘COLLEGE’(Civic, Liberal, and Global Education) 과정은 1학년 공통과정으로 ‘무엇이 가치 있는 삶인가’를 질문하도록 설계돼 있다. 이러한 과정들은 모두 전공 선택 이전에 ‘나’를 탐색하는 시간을 제도적으로 보장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물론 국내에서도 유의미한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UNIST(울산과학기술원)는 1학년 전원을 무전공으로 입학시킨 뒤, ‘전공탐색 세미나’, ‘융합캡스톤’, ‘학문 간 탐구 프로젝트’ 등을 통해 실제 연구·문제해결 경험을 기반으로 전공을 선택하도록 유도한다. KAIST 역시 전공 쿼터 제한 없이 자유로운 선택을 보장하는 대신, 신입생 학교와 전담 교수제를 통해 탐색의 과정을 밀착 지원하고 있다. 이러한 사례들은 ‘전공 선택의 자유’보다 ‘탐색의 경험’을 제도적으로 설계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결국 제도는 틀을 제공할 뿐, 탐색의 내실은 관계와 피드백 속에서 완성된다.
학교·지역·대학은 학생들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질문을 이어갈 수 있도록, 세 기관 간 진로 연계 생태계를 구축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고교학점제와 무전공제가 단순한 정책을 넘어, 학생의 ‘삶 중심 진로교육’으로 전환되는 관문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 학생들에게 진로 선택을 보장하기 위해선 “제도보다 사고력·탐색력을 기르는 게 선과제”라는 의견도 있다.
“전적으로 공감한다. 제도는 필요하지만, 동시에 틀과 한계를 함께 가지고 있다. 진짜 필요한 것은 제도보다 내적 자유, 즉 학생 스스로 사고하고 탐색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교육이다.
저 역시 수업 시간에 학생들과 함께 에세이를 쓴다. 학생들이 자신의 생각을 글로 정리하다 보면 “나는 왜 이렇게 배워왔는가?”, “이 선택은 누구의 의도였는가?”를 성찰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제도보다 더 강력한 교육의 힘인 사유와 표현의 능력이 발현되는 것을 본다.
존 듀이가 “교육은 삶의 준비가 아니라 삶 그 자체다”라고 말했듯, 탐색의 자유는 결국 삶을 살아보는 과정 속에서 길러지는 것이지, 제도 안에서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또 캐럴 드웩(Carol Dweck) 교수의 ‘성장 마인드셋(Growth Mindset)’ 개념처럼,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시도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일이 중요하다.
학생이 탐색의 과정에서 좌절할 때, 그 경험을 평가가 아니라 성장으로 환원시켜주는 교사의 역할이 필요하다. 결국 교육이 해야 할 일은 새로운 제도를 설계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의 근육을 키워주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 진로교육이 나아가야할 방향성은.
“진로교육은 ‘제도적 진로지도’에서 ‘문화적 진로교육’으로 나아가야 한다. 학생이 진로를 설계하는 존재이기 이전에, 삶을 성찰하고 사회와 관계 맺는 주체로 성장하는 것이 우선돼야 한다.
해외 대학들은 이러한 철학을 이미 제도 안에 녹여내고 있다. 예를 들어 스탠퍼드대의 ‘Designing Your Life Lab’은 디자인 사고를 기반으로 학생들이 자신의 삶을 설계·실행·수정하는 과정을 학습하도록 한다. 미네르바대학 역시 1학년 공통과정인 ‘Cornerstone’을 통해 모든 학생이 비판적 사고, 창의적 문제 해결, 협업, 커뮤니케이션 역량을 기초로 학문을 탐색하도록 하고 있다.
앞으로의 진로교육은 이같은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탐색에서 표현으로, 표현에서 사회적 참여로 확장되는 교육. 이것이야말로 미래 사회가 요구하는 진정한 역량을 기르는 길이다.”
- 진로를 고민하는 고3 수험생과 대학생에게 한 말씀 부탁드린다.
“진로에는 완벽한 공식이 없다. 많은 학생들이 “이 길이 맞을까”, “틀린 선택을 하는 것은 아닐까”라고 묻지만, 진로는 맞고 틀릴 수 있는 선택이 아니라 스스로의 방향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여러 길을 직접 걸어보고, 때로는 돌아가면서 자신에게 맞는 길을 탐색하는 과정 자체가 진로다.
한 번의 선택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다시 선택할 수 있는 용기와 유연함이다. 불안을 부정적인 감정으로만 보지 않았으면 한다. 불안은 방향을 찾고자 하는 내면의 신호이기도 하다.
지금 이 순간, 학생들은 ‘준비 중인 사람’이 아니라 이미 ‘시작한 사람’이다. 남과의 비교가 아닌 자신만의 기준으로 출발해야 한다. 스스로 질문하고, 기록하고, 표현하며, 도전하는 과정 속에서 길은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 길이 멀고 험하더라도, 그 모든 경험은 결국 자신만의 나침반이 돼줄 것이다. 진로는 누군가의 길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리고 함께 만들어가는 새로운 길이다.”
한민정 서울시립대 진로교육 객원교수는…
고려대학교에서 문학사, 교육학 석사학위를 받고, 이후 교육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는 서울시립대 인재개발실에서 진로교육을 담당하며, 학생들의 진로 탐색과 핵심역량 개발을 중심으로 한 교육 프로그램을 설계·운영하고 있다. 특히 서울시립대 학생들을 위한 ‘미래역량 기반 진로설계 교과목(UOS미래디자인, UOS커리어디자인)’을 직접 개발해 운영 중이며, 고교교육 기여대학 지원사업의 일환으로 서울시립대-제주시교육청 연계 ‘UOS 고교학점제’ 지원 수업에도 참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