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주 칼럼] 고등교육이 맞닥뜨린 거대 변화

박형주 아주대 수학과 석좌교수(전 아주대 총장)

2025-11-10     한국대학신문
박형주 아주대 수학과 석좌교수(전 아주대 총장)

세계적으로 AI 빅데이터 분야의 거대 기업으로 부상한 팔란티어(Palantir)가 대학 학위 없는 고등학교 졸업생들을 정규직으로 채용하는 ‘능력주의 펠로십(Meritocracy Fellowship)’ 프로그램을 시작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10대 고교 졸업생들을 선발해서 780만 원의 월급을 지급한다는 것인데, 회사 측은 “3~4주 만에 누가 회사 환경에서 능력을 발휘하는지 명확히 확인할 수 있었다”라고 밝혔다. 팔란티어의 알렉산더 카프 CEO는 이전부터 대학무용론을 주장하던 사람인데, “요즘 대학생을 뽑는다는 것은 상투적인 말만 반복하는 사람을 고용하는 것과 같다”라거나, “기존 대학 제도가 더 이상 유능한 인재를 길러내는 신뢰할 만한 절차가 아니다”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팔란티어의 사례에서 보듯이, 대학 교육이 산업계 기술 발전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불신은 최근에 더 강화되는 것으로 보인다. 구글, 테슬라, 애플 등의 글로벌 기업은 채용 시 학위를 필수 조건으로 두지 않는 사례를 늘리고 있고, IBM도 전체 직원의 15%는 4년제 학위 미소지자다. 이런 테크 기업들이 요구하는 전문성을 무크(MOOC) 등의 다양한 플랫폼을 통해 얻을 수 있게 된 젊은이들은 ‘대학을 꼭 가야 하는가?’라고 묻고 있는 것이다. 최근 국내 대학에서 학생 중도탈락률이 높아지고 있는 현상도 의대 열풍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수준이어서, 학생들의 선택지가 많아졌다는 시각으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고등교육의 위기를 논할 때 빠지지 않는 게 저출산 추세로 인한 인구 구조의 변화와 15년 이상 이어지고 있는 등록금 동결 문제다. 이런 요인들로 인해 대학이 교육의 질을 높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고 연구와 산학협력에 충분한 투자를 하지 못하는 건 사실이다.

반면에 이런 국지적 요인들에만 매달리다 보면 좀더 근본적인 글로벌 메가트렌드를 놓칠 수 있다. 일례로, 2020년 미국에서도 대학생 수가 60만 명 이상 감소했다. 코로나 팬데믹의 영향이라는 반론도 있지만 더 거슬러 가보면 2018년 미국 대학의 30%만이 정원을 채웠고, 그나마도 수강자의 74%는 전통적인 대학생이 아니라 평생학습자였다는 통계가 달라진 글로벌 고등교육의 위상을 보여준다.

챗지피티(ChatGPT)에게 물으면 즉시 친절한 답을 들을 수 있는 세상이다. 대학 신입생들의 기초수학 반배치를 위한 온라인 진단평가(구 배치고사)도 AI의 무차별 활용으로 존속 여부를 고민해야 하는 처지다. 이런 세상에서, 수백 년 동안 대학의 주요 기능이었던 지식 전수만으로 학생을 설득하겠다는 것은 더이상 지속가능하지 않다.

AI 시대의 대학 캠퍼스는 수업을 듣는 공간 이상이어야 한다. 고유의 대학 문화와 다양한 교과·비교과 활동을 통해 학생의 지적 성장과 미래 준비가 가능해야 한다. 이런 시각에서 교육 혁신의 방향은 ‘필요할 때 학습할 수 있는 능력’과 ‘문제 해결 능력’을 중심으로 해야 하지 않을까. 신기술과 새로운 지식의 창출이 끊임없이 이뤄지는 시대에는 학교에서 배운 것으로 평생 먹고 살 수 있는게 아니라 ‘부단한 업데이트’, 즉 필요할 때 배우는 능력이 사활적이기 때문이다. 앨빈 토플러가 ‘필요할 때 배우는 능력’이 없는 사람이 미래의 문맹자라고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혁신적이라고 불리는 요즘 기업의 직원은 문제 해결을 위해 이합집산하는 프로젝트형 조직에 속해 일한다. 신규 프로젝트에 투입된 신입 직원은 그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몰랐던 지식을 습득하고, 이전에 접하지 못했던 다양한 분야와 만나며, 연령과 전문성이 다양한 팀원과 함께 협업한다. 미국상공회의소의 제이슨 티스코 교육일자리연구소장은 미래의 대학이 이런 일자리의 조직 형태를 유사하게 구현해 학과의 칸막이 대신 문제 해결형 조직의 형태로 이합집산이 가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 사회는 고등교육의 운명을 결정할 궁극의 질문에 맞닥트려 있다. “건물과 담장을 가진 전통적 형태의 대학은 왜 존속해야 하는가?” 기존 방식의 고수는 기존 대학의 소멸로 이어질 거라는 미래학자들의 예언을 귀담아들어야 한다. 아주대에서 학생 취업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비교과 활동을 많이 한 학생들의 취업 성공률이 유의미하게 높았다. 다양한 비교과 활동을 제공하고 학생들의 참여를 독려하는 방안이 필요하다.

미래 지향적인 기초·교양교육 체계를 확립하고 전공 간 경계가 없는 융복합 교육 생태계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전공의 학생들이 동일 과목을 일상적으로 수강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게 그냥 이뤄지진 않을거라서, 동일 수업이라도 전공에 따라 별도의 평가군을 만드는 등의 제도 변화가 수반되어야 학생들이 타 전공과목을 용감하게 선택할 수 있다. 치밀한 인프라와 제도의 변화 없이는 ‘혁신은 불편한 시도일 뿐’이다. 다양한 수준의 학생들이 동일 수업을 따라가도록 돕는 인공지능 기반의 ‘수준별 맞춤형 시스템’도 도움이 될 수 있다. 아주대의 학생 수준 맞춤형의 파일럿 수업은 새로운 방식이 낙제 비율을 크게 낮출 수 있음을 보여준 바 있다.

단순해 보이는 사회적 기술적 문제조차도 현장의 문제 이해 능력뿐 아니라, 실제 해결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지적 체험과 깊이 있는 연관 분야의 학습을 필요로 한다. 미래의 대학은 이런 학생 참여의 요소와 지적 체험의 요소를 적절하게 교육 과정에 반영해야 한다. 학생 참여의 결과가 유치한 수준에 머물지 않기 위해서는 전공 분야와 무관하게 갖춰야 하는 기본적인 지적 소양을 한 단계 높이는 노력이 필요하다. 기초 교양 교육 전반을 점검하고, 전공 진입의 도구 정도가 아닌 대학 교육의 코어 수준으로 강화해야 한다.

고강도의 상호작용 교육은 무크(MOOC) 등의 대체재에 대한 분명하게 차등화된 가치를 제공한다. 고등교육 혁신의 사례로 자주 언급되는 미네르바 대학의 경우도 혁신의 키워드는 ‘비대면 수업’이나 ‘적응형’보다는 ‘상호작용’인 것으로 보인다. 국내에서도 신설 태재대학교가 이런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여기에 친구, 동아리, 캠퍼스가 주는 유무형의 기회와 같이, 교과학습을 넘어서는 영역까지 강화한다면 일단 위기를 넘길 시작은 되지 않을까.

<한국대학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