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생각] 오은경 동덕여대 교수, 국내 최초 K-실크로드 투르크학과 개설… “한국 인문학이 세계를 번역하는 시대 열 것”

“왜 한국에는 투르크학이 없는가” 부재의 공간을 채운 오은경 교수의 30년 여정 “‘K’는 한국적 시선”… 지식 수입국에서 생산국으로의 전환 선언

2025-11-11     윤채빈 기자
오은경 동덕여대 교수는 본지에 K-실크로드 투르크학과를 소개하며 “한국 인문학이 이제는 세계를 새롭게 번역하는 시대를 열어야 한다”고 했다. (사진=본인 제공)

[한국대학신문 윤채빈 기자] “한국 인문학이 이제는 세계를 새롭게 번역하는 시대를 열어야 한다.”

30여 년간 투르크 지역을 연구해온 오은경 동덕여자대학교 교수는 최근 국내 최초로 개설된 <K-실크로드 투르크학과> 와 <실크로드 한국학 트랙>을 통해, ‘주변에서 중심으로, 모방에서 창조로’의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학과명에 담긴 ‘K’는 단순한 Korea의 약자가 아닌, “한국적 시선으로 세계를 해석하겠다”는 오 교수의 선언다.

본지는 지난달 동덕여대에서 오은경 교수를 만나 학과 개설의 의미와 한국 인문학의 방향을 들어봤다.

-간단한 자기소개와 함께 이번에 개설된 학과를 소개해준다면.
“한국외대에서 학부를 마치고 튀르키예 하제테페대학교에서 터키문학과 비교문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귀국 후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박사후과정(post-doc)을 밟은 후 교수생활을 휴직하고 우즈베키스탄으로 다시 유학길에 올라 우즈베키스탄 국립학술원에서 우즈베크 구비문학과 민속학으로 인문학 국가박사(Doctor of Philology) 학위를 취득했다. 튀르키예 국립 앙카라대, 우즈베키스탄 니자미 사범대에서는 한국학을 가르쳤고, 현재는 동덕여대 교양대학 교수이자 유라시아투르크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작년 1월에는 <투르크학 인문대사전>을 발간했는데, 이 사전의 모든 것을 처음부터 기획부터 편집까지 주도했으며 주요 저자로 참여했다. 이 과정을 거치며, <K-실크로드 투르크학>와 <실크로드 한국학 트랙> 개설이라는 결실을 맺었다.

대학원 과정인 K-실크로드 투르크학과는 언어·문학·역사·정치·경제·문화·예술·국제관계를 아우르는 융합형 커리큘럼으로, 유라시아를 하나의 문명지도로 새롭게 읽어내는 시도다. 또 학부 과정의 실크로드 한국학 트랙은 투르크권 학생들이 한국어·한국문학·한국문화를 배우며 양국을 연결하는 국제형 인재로 성장하도록 설계했다. 두 과정은 서로를 배우며 함께 성장하는 ‘쌍방향 학문 플랫폼’이라 할 수 있다.”

-투르크학 연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제 연구 인생의 출발점에는 하나의 질문이 있었다. “왜 한국에는 투르크학이 없는가.”다.

투르크 문명권에서 석사, 박사, 국가박사까지 받았지만, 한국에는 이 전공을 살릴 자리가 없었다. 24년간 동덕여대에서 근무하면서도 전공 강좌를 한 번도 개설하지 못했다. 대신 ‘이슬람문화의 이해’ 같은 교양과목을 통해 겨우 학문을 이어왔다.

그러나 투르크 세계는 유라시아 대륙의 3분의 1을 차지하며, 언어·문화·역사적으로 한국과 깊은 친연성을 지닌 문명권이다. 이런 학문적 공백은 단순히 연구의 부재가 아니라, 한국 인문학의 지리적 한계를 보여주는 상징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이 ‘부재의 공간’을 채워 넣는 일을 인생의 과제로 삼았다.”

-학과명에 붙은 ‘K’는 어떤 의미인가.
“많은 사람들이 ‘K’를 단순히 Korea로 이해하지만, 내게 ‘K’는 “한국적 시각으로 세계를 새롭게 해석하자”는 학문적 선언이다. 투르크학 역시 유럽, 러시아 등 서구중심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이제는 한국인의 역사적 경험, 문명적 감수성, 분단과 통일의 기억을 통해 유라시아의 문화를 다시 읽어야 할 때다.

지금까지 우리는 서구의 담론을 수입해왔다. 이제는 지식의 중심을 다시 ‘서울’로 옮길 때다. 한국이 ‘지식을 수입하는 나라’에서 ‘지식을 생산하는 나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연구 방법, 개념, 언어 속에 한국적 경험을 체계화해야 한다. <K-실크로드 투르크학>은 바로 그 전환의 상징이다. 한국 인문학이 더 이상 변방이 아닌, 세계 인문학을 재구성하는 중심축으로 서는 첫 사례라고 생각한다.”

-기존의 중동학, 중앙아시아학과는 어떻게 다른가.
“기존 지역학이 중동, 중앙아시아 등 지역단위로 학문체계를 만들었다면, 투르크학은 ‘문명’에 따른 구분으로 언어·문학·신화·사상·종교·사회제도·경제를 하나의 문명 네트워크로 읽어내는 통합학문이다. 예를 들어, 중앙아시아의 영웅서사시에서 정치문화의 기원을 읽고, 현대 터키문학 속에서 정체성 변화를 탐구하는 방식이다. 이런 접근은 투르크 문명권을 하나의 인류 기억체계로 읽어내는 새로운 시도다. 특히 투르크권 외국인 학생에게도 자국 연구를 ‘투르크학’이라는 틀로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것이 핵심이다.”

-커리큘럼에서 중점을 둔 부분은 무엇인가.
“‘학문과 현장의 이중 언어’를 기준으로 삼았다. 즉, 인문학적 깊이를 유지하면서도 정책과 산업, 문화 현장에서 활용 가능한 실천 능력을 함께 키우는 것이다. 예를 들어 ‘범투르크 문학권 연구’, ‘K-컬처와 투르크 문화콘텐츠의 이해, 기획, 운영’, ‘K-실크로드 외교와 국제협력’ 같은 과목이 대표적이다. 학생들이 실제로 투르크권 전문가, 문화기획자, 국제협력 실무자로 성장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언어’를 중심에 두고 학과를 개설하신 것 같다.
“그렇다. 언어는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핵심이자, “세계로 들어가는 열쇠”로 비유할 수 있다. 같은 공간이라도 어떤 언어의 열쇠로 문을 여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예를 들어, 우즈베키스탄에서 우즈베크어로 대화할 때와 러시아어나 영어로 대화할 때 사람들의 마음이 열리는 정도가 다르다. 언어는 단순한 소통의 수단이 아니라, 그 사회의 정서와 사고방식을 여는 창이다.

하지만 언어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언어를 기반으로 정치·경제·역사·문화·민속 등 다양한 영역을 함께 다룬다. ‘지리적 분류’에 머무르지 않고, 투르크 문명이라는 ‘문명권 개념’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이 학과가 길러낼 인재상은.
“우리 학생들이 ‘Silkroad Connector’, 즉 ‘실크로드형 지식외교관’으로 성장하길 바란다. 그들은 언어와 문화를 매개로 동서 문명을 잇는 다리이자, 지식과 평화를 연결하는 실천가가 될 것이다. 한국 인문학의 새로운 세대이자, 세계 속 한국의 정신을 번역하고 확장하는 사람들, 바로 그런 인재를 꿈꾼다.”

-끝으로 한국 학계에 전하고 싶은 바람이 있다면.
“소외 학문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한국 학계에서 살아남기란 너무 어렵다. 투르크학은 아직 한국연구재단의 학문분류코드에도 없다. 이런 제도적 결핍 속에서 연구자는 늘 ‘기타’로 분류된다.

<유라시아투르크연구소>를 만들고 15억 원 규모의 토대연구 과제를 수행하며 국내외적 반향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 어떤 학술활동이나 결과물도 대학에서는 재임용, 재계약 등 평가에 반영해주지 않는 현실은 참 안타깝다. 소외학문 연구자들이 피를 토하는 헌신 없이도 자신의 학문을 이어갈 수 있는 시스템이 마련돼야 한다. 그래야 한국 대학에도 미래가 있고, K-인문학이 세계를 이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