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은 짧게, 실무는 길게… 산업 현장 전문가가 대학 강의실을 바꾼다
방송·공연계 레전드부터 AI 개발 전문가까지 대학 강단으로 링크 3.0, 라이즈 시행이 계기… 실무 중심 강의 확대 추세 전문가들 “현장 경험 중요…산업 속도 따라붙는 교육 돼야”
[한국대학신문 김의진 기자] 산업 현장 전문가들이 대학 강의실로 속속 들어오고 있다. 방송계와 공연계의 이른바 ‘레전드급’ 전문가를 비롯해 인공지능(AI) 개발자, 현직 교사 등 업계 실무자들이 학생들을 직접 가르치는 사례가 잇따른다.
7일 교육계에 따르면 국내 주요 대학들을 중심으로 산업 현장 전문가들이 진행하는 강의가 잇따르고 있다. 전문가들의 경험담을 통해 학생들에게 산업 현장의 언어를 가르치고 향후 경쟁력을 갖추게 한다는 전략에서다.
특히 교육부의 3단계 산학연협력 선도대학 육성사업(LINC 3.0)을 진행하고 올해엔 지역혁신 중심 대학지원체계(RISE)까지 전국 17개 시·도로 본격화되면서 대학이 산업체와 공동으로 강좌를 개설하고 실무 전문가를 교수로 초빙하는 사례가 더욱 확산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경기도 소재 전문대인 국제대는 이달 특별한 수업을 준비했다. 방송·공연계에서 한 시대를 이끌었던 두 명의 거장을 초청해 엔터테인먼트학부 학생들과 만나는 명사 릴레이 특강을 여는 것이다. 40년간 수많은 인기 예능 프로그램을 집필해 온 유성찬 방송작가와 K-팝의 세계화를 이끈 김성학 드림메이커 엔터테인먼트 대표가 강단에 선다.
유성찬 작가는 1980년대 ‘유머1번지’와 ‘웃으며 삽시다’를 시작으로 ‘히든싱어’ ‘헤이헤이헤이’ 등 시대를 대표하는 프로그램을 만들며 ‘예능계의 교과서’로 불린다. 그는 강연에서 아이디어가 어떻게 프로그램으로 완성되는지, 작가로서 방송 현장에서 마주한 시행착오와 생생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려줄 예정이다.
김성학 대표는 동방신기, 소녀시대, 슈퍼주니어 등 SM엔터테인먼트 소속 아티스트들의 글로벌 투어를 기획·운영해 온 인물이다. 그는 특강에서 공연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기획자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현장 노하우를 이야기할 계획이다.
조대원 국제대 엔터테인먼트학부장은 이날 본지와 통화에서 “학생들이 방송과 공연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눈앞에서 배우는 수업”이라며 “현장에서 들은 이야기가 훨씬 오래 남고 취업 경쟁력으로 이어진다. 학생들이 미래의 직업을 더 구체적으로 그릴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4년제 대학들도 산업 현장과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현장형 강의를 늘리고 있다. 특히 AI나 빅데이터, 창업처럼 빠르게 변하는 분야의 경우 실제 일을 해본 전문가의 이야기가 훨씬 현실적이라는 판단에서다.
세종대는 지난달 교육대학원 인공지능융합교육전공 학생들을 대상으로 특강을 열었다. 강연자는 현직 초등학교 교사인 임세범 서울중광초 교사였다. 임세범 교사는 자신이 교실에서 개발하고 활용해온 교육용 AI 챗봇을 주제로 AI가 어떻게 수업 속에서 교사와 학생을 연결하는지 보여줬다.
호남대 유아교육학과에서도 현장 전문가 강의가 이어졌다. 유치원에서 오랜 경력을 쌓은 백희숙 세운그림유치원 원장을 초청해 유아교육기관의 물리적 환경을 주제로 특강을 진행했다. 백희숙 원장은 아이들의 놀이공간이나 교실 배치 등을 보여주며 아이들이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게 교육환경의 본질이라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산업체 경력을 연구 경력과 동등하게 인정하는 분위기가 과거와 비교해 두드러지고 있다고 설명한다. 연구실에서 논문을 쓴 경험과 기업에서 제품을 개발한 경험을 동일한 가치로 여기는 분위기가 훨씬 강해졌다는 이야기다.
김경성 전 서울교대 총장(교육학박사)은 통화에서 “학생 입장에서는 산업 전문가에게서 듣는 이야기가 현장에서 지금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수업·강연이 생동감을 얻는다”며 “학생이 배운 내용을 증명할 수 있는 포트폴리오가 없으면 취업이 어려운 시대다. 산업체 경력자의 한 마디가 학생들에겐 현장의 참모습을 가르쳐주는 교육적 메시지”라고 말했다.
■ 기업이 원하는 건 바로 일할 수 있는 인재 = 산업계가 당장 일할 수 있는 실무형 인재를 대학에 요구하는 것도 현장 전문가가 교육과정으로 들어오게 하는 배경이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지난해 연말 발표한 ‘콘텐츠산업 창의인력 조사연구’ 결과를 보면, 국내 콘텐츠 기업의 10곳 중 7곳(약 72%)이 신입사원을 뽑을 때 가장 중요하게 보는 요소로 실무 경험을 꼽았다. 실제로 어떤 프로젝트를 했는지, 어떤 결과물을 만들어봤는지가 핵심 평가 기준이 된 것이다.
한국디자인진흥원이 올해 초 발표한 ‘디자인·콘텐츠 산업인력 보고서’에서도 디자인과 콘텐츠 업계의 절반 이상이 AI와 디지털 도구 활용 능력을 키우는 실무 중심 교육이 시급하다고 답했다. 현장에서 요구되는 문제 해결력과 협업 경험이 인재의 핵심 역량으로 떠오르는 것이다.
AI 기반의 네트워크 분석 기업인 램파드의 김신규 대표는 본지에 “요즘은 학생이 졸업하기 전부터 현장 프로젝트를 해본 경험이 있는지 먼저 본다”며 “이론만 배우고 실제로 손을 써보지 않은 인재는 바로 일을 맡기기가 어렵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김성학 대표도 “공연 산업은 운영의 디테일, 현장에서의 감각이 훨씬 중요하다”며 “콘서트가 시작되기까지 무대 조명, 음향, 동선 등 하나라도 어긋나면 공연 전체가 흔들린다. 이런 판단력은 오직 현장에서 몸으로 익힐 수 있다”고 강조했다.
김 대표는 이어 “다음 세대가 현장에 더 빨리 적응해야 산업이 성장한다”며 “학생들이 창의력은 뛰어나지만 현실 감각은 부족한 경우가 많다. 대학에서 현업 시스템을 미리 배우면 현장 투입까지 시간을 절반으로 줄일 수 있다”고 덧붙였다.
다만 일각에선 산업의 변화 속도에 비해 대학의 움직임이 여전히 느려 이를 개선하지 않고선 아무리 현장 중심 수업을 늘려도 효과를 극대화하긴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성오현 대경대 경영부총장은 “AI 분야는 6개월만 지나도 기술이 완전히 달라지는 세상인데 국내 대학들은 현행 규정대로 하면 새로운 강의를 하나 열려고 해도 준비부터 승인까지 1년 넘게 걸린다”며 “교재 검토, 교과과정 심의 등 행정 절차가 많아 학생이 배울 때쯤에는 이미 산업 기술이 한 세대 뒤처져 있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성 부총장은 이어 “산업 현장보다 대학이 느리게 움직이는 것을 국내에선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해당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우리나라 교육이 더욱 높은 의미를 갖게 될 것”이라며 “대학이 산업의 속도를 따라잡고 같은 속도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교육 제도 개선이 더욱 활발하게 이뤄져야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