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현장은 숨이 턱 막힌다”… 대안 없는 ‘아니면 말고’식 법안 발의에 대학가 ‘비명’

최종 합격자 발표 전 채점 기준 공개? “입학처 업무 마비시키고 소송전 부추기는 꼴” 재정 지원 없는 전형료 감액 법안…생색은 의원이, 부담은 대학이? 교육 현장 이해 없는 ‘졸속 입법’ 남발, 입법 만능주의가 낳은 행정 참사

2025-11-20     백두산 기자
국회 본회의장 (사진= 국회 홈페이지)

[한국대학신문 백두산 기자] “법안을 발의한 의원님들께 묻고 싶습니다. 대학 입시 현장이 12월, 1월에 어떻게 돌아가는지 단 하루라도 와서 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건 단순히 일이 늘어나는 차원이 아닙니다. 대학 행정을 마비시키고, 입시판을 소송의 장으로 만들겠다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서울 소재 A대학 입학처 관계자)

제22대 국회의 입법 드라이브가 대학가의 현실을 외면한 채 폭주하고 있다. 대학의 자율성과 행정적 현실은 고려하지 않은 채, ‘공정성’과 ‘복지’라는 미명 아래 설익은 법안들이 쏟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발의된 「고등교육법 일부개정법률안」들은 대학 현장의 목소리를 철저히 외면한 대표적인 ‘탁상행정’ 사례로 지목된다. 본지는 최근 대학가를 강타한 두 건의 개정안을 통해, 대안 없이 대학을 옥죄는 입법 만능주의의 폐해 사례를 다뤄보았다.

■ “채점 기준 미리 내놔라”…현실 무시한 ‘깜깜이’ 법안 = 지난달 31일 이개호 의원 등 10인이 발의한 「고등교육법 일부개정법률안」은 대학가에 거센 후폭풍을 몰고 왔다.

개정안의 골자는 대학이 논술 등 필답고사를 실시한 경우, 기출문제와 채점 기준을 ‘최종 합격자 발표 전’에 공개하도록 강제하는 것이다. 학생들의 알 권리와 입학 전형의 공정성을 보장하겠다는 취지다.

그러나 현장의 반응은 냉담하다 못해 격앙되어 있다. 취지는 좋으나, 현실 가능성이 전무하다는 지적이다. 현재 대학들은 「공교육 정상화 촉진 및 선행교육 규제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매년 3월 31일까지 ‘선행학습 영향평가 보고서’를 통해 기출문제와 출제 의도, 채점 기준 등을 상세히 공개하고 있다. 이미 법적 장치가 마련되어 있음에도, 시기를 ‘합격자 발표 전’으로 앞당기는 것은 입시 행정의 특수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처사다.

서울 소재 B대학 입학처 관계자는 “12월과 1월은 수시 합격자 발표, 정시 원서 접수 및 전형, 등록금 고지 등 대학 입학처의 업무가 폭발하는 시기”라며 “이 시기에 채점 기준과 결과를 정리해 공개하라는 것은 사실상 입학처 업무를 마비시키겠다는 뜻”이라고 성토했다.

더 큰 문제는 ‘공정성 시비’의 폭증 가능성이다. 대학별 고사, 특히 논술이나 면접은 정량평가인 수능과 달리 정성적 요소가 포함된다. 채점 기준이 공개된다 하더라도, 수험생이 자의적으로 기억하는 답안(가채점)과 대학의 실제 채점 결과 사이에는 괴리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서울 소재 C대학 입학처 관계자는 “수험생들은 본인이 작성한 답안을 100%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는데, 채점 기준이 공개되면 ‘나는 이렇게 썼으니 몇 점이다’라고 자가 채점한 뒤 불합격 시 대학에 엄청난 민원을 제기할 것”이라며 우려를 표했다.

그는 이어 “논리 전개 과정에 대한 가감점 등 미세한 채점 영역까지 수치화해 설득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며 “결국 합격자 발표 시즌이 민원 대응과 이의 신청, 나아가 소송전으로 얼룩질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고 지적했다.

법안의 모호성도 도마 위에 올랐다. 개정안은 공개 대상을 ‘논술 등 필답고사’로 한정했지만, 예체능 계열의 실기고사 중에도 필답 형식이 존재한다. 영화전공, 연출전공에서 주로 활용되는 시나리오 작성이나 작문능력 평가, 문예창작과의 운문, 산문 등 작문 시험, 작곡전공의 화성학 시험이나 즉석 멜로디 작곡 등이 이에 해당한다.

대학가에서는 이러한 특수성까지 고려하지 않은 채 일괄적인 공개를 의무화할 경우, 대학별 고사의 변별력과 자율성은 심각하게 훼손될 수 있다고 우려를 표했다.

■ 생색은 국회가, 청구서는 대학에…재정 대책 없는 ‘퍼주기 입법’ = 지난 7일 이훈기 의원이 발의한 또 다른 「고등교육법 일부개정법률안」 역시 대학들의 공분을 사고 있다.

해당 법안은 다자녀 가구의 자녀를 특별전형으로 선발할 수 있도록 하고, 이들의 입학 전형료를 면제하거나 감액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저출산 시대에 다자녀 가구를 지원하겠다는 취지에는 이견이 없으나, 문제는 ‘비용’이다.

대학들은 정부나 지자체의 재정 지원 없이 대학에만 부담을 떠넘기는 구조를 비판한다. 이미 16년째 이어지는 등록금 동결로 대학 재정이 한계에 다다른 상황에서, 국가가 책임져야 할 복지 비용까지 대학에 전가하는 것은 무책임하다는 지적이다.

서울 소재 C대학 관계자는 “국가유공자나 사회적 배려 대상자에 대한 전형료 감면은 이미 대학들이 사회적 책무 차원에서 시행하고 있다”면서도 “국가 정책적으로 장려해야 할 다자녀 지원의 부담을 교육부 지원 없이 왜 사립대학이 오롯이 져야 하는가”라고 반문했다. 그는 “생색은 법안을 발의한 의원들이 내고, 실제 금전적 손해는 대학이 감수하라는 식의 입법은 전형적인 ‘내로남불’ 행태”라고 꼬집었다.

■ “교육위도 아닌데…” 전문성 결여된 ‘실적용 발의’ 멈춰야 = 현장의 불만은 단순히 개별 법안의 내용을 넘어 국회의 입법 관행으로 향한다. 교육 현안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필수적인 법안들이 교육위원회 소속이 아닌 의원들에 의해, 혹은 지역구 관리 차원에서 졸속으로 발의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번에 논란이 된 법안들에 대해 대학 관계자들은 “사적인 자리에서 나온 민원성 이야기를 검증 없이 법안으로 만든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보내고 있다. 입시의 안정성과 예측 가능성은 수험생과 학부모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다. 그러나 국회는 입시 철마다 ‘아니면 말고’ 식의 설익은 법안을 던지며 현장의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