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위석 / 본지 논설위원, 전 월간 에머지 발행인

외국 사람에게 다른 나라가 문화적으로 허장성세하는 것은 약간 꼴불견일 것이고 경제적 허장 성세는 좀 배가 아플 뿐 실제적 피해는 없다. 반대로 문화적으로는 배우고 경제적으로는 ‘우리도 하면 된다’는 분발심을 일으킴으로써 그 도움은 클 수가 있다. 일본의 허장성세가 한국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정치적, 그것도 군사적인 것에 한정된다. 이쯤에서 생각나는 것은 선조가 임란(壬亂) 직전에 사정을 알아 보라고 파견했던 서인 정사 황윤길과 동인인 부사 김성일의 정반대 되는 정보 보고다. 황윤길은 일본이 곧 쳐들어 올것이라고 말했고 김성일은 도요토미에게 그럴 능력이 없다고 보고했다. 이 두 상반되는 보고를 다 맞는 것으로 포용하는 것이 지금도 필요하다. 왜냐하면 일본은 저자세와 허장성세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나라이므로. 한국 사람의 기억에 가장 깊게 패인 일제가 준 상처는 일본 정부가 식민지 정책의 하나로 한국 사람들에게 강제한 창씨개명(創氏改名)과 일본어 사용이다. 이번 방문에서 일본의 일한문화교류기금의 이사장이자 미쓰비시 상사의 고문인 우찌다 토미요(內田富夫)씨는 이 일을 놓고 일본이 범한 큰 실수였다고 말했다. 나는 우찌다 이사장의 앞의 말을 들으며 그가 더 근본적인 말은 하지 않고 있다고 생각했다. 한국 사람에게 창씨개명과 일어 사용을 강제한 것은 당하는 사람에게는 최대의 수모였으나 이미 한국을 병탄(倂呑)하는데 성공한 일본에게는, 특히 메이지 유신 정권에게는 당연하면서도 한갓 지엽적인 수순이었을 것이다.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는 한일합방 직후 서울에서 벌인 술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하이꾸를 지어 읊었다. “高麗(=높고도 아름다움)의 하늘에 높고도 아름답게 펄럭이는 히노마루(日丸)!” 한 참석자는 이토오에게 “다이고(太閤=도요또미 히데요시)의 유지(遺志)를 각하가 비로소 성취하셨습니다”라고 화답하였다. 메이지 유신은 도요토미가 선택했던 침략자의 길을 격세유전으로 이어 받았던 것이다. 이노구치 교수의 도요토미에 관한 평가는 메이지 정부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토오의 이 하이꾸(俳句)를 구성하는 것은 허장성세와 ‘히니꾸(皮肉=반어, 反語)’다. 한때는 조선이 자기네 나라보다 낫다고 여겼는데 자기네 보다 못한 정도를 지나서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니라고 느끼고는 내뱉은 이죽거림이 이 하이꾸가 담고 있는 자기도취적 반어다. 도요토미는 중국과 인도를 침략하지 못했으나 메이지 유신을 계승한 일본은 중국, 동남아, 인도 뿐만 아니라 전쟁의 상대를 호주, 미국, 영국 등 연합국까지 확대하였다. 허장성세와 반어법으로 전진할 수 있는 거리는 짧았다. 그것은 자멸에 이르렀다. 2차대전의 패전은 메이지 유신이 가지고 온 결과였다. 연세대를 창립했던 언더우드 가문의 원일한 교수는 일본이 한국에 끼친 공로는 철도를 건설하고 신식 학교를 세운 것이 아니라 양반제도를 없애 준것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여기에는 일본은 식민지 종주국으로서 건설한 것은 보잘 것이 없었으나 파괴에는 확실하게 일조했다는 뜻이 깔려 있다. 그러나 나는 일본에게는 파괴자라는 칭호도 과분한 영광이라고 생각한다. 슘페터는 ‘창조적 파괴’라는 말을 썼거니와 파괴는 위대한 것일 때가 있다. 조선 왕조는 일본에게 먹히기 전에 이미 망해 있었다고 본다. 이하응이나 개화파의 단말마적 회생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그 노력은 볼 것이 없었고 때는 이미 늦어 있었던 것 같다. 일본은 이미 죽은 조선을 뜯어 먹은 하이에나 역할을 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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