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규홍 본지 전문위원 / 서원대 교수

교육에 관한 한 우리나라는 4천8백만(2004년말 기준) 국민이 모두 다 전문가이다. 그래서 교육 문제만 나오면 백가쟁명 식으로 너도나도 한마디씩 언급하는 것이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그런 현상 덕분에 우리 교육은 강으로 가야할 배가 산으로 올라가는 모양을 보일 때가 많이 있다.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는 대단한 우리의 교육열이라지만 교육열이 우리만의 특이한 현상은 아니다. 자기 자식 공부 잘 하길 바라지 않고 자식 머리가 영특하다는 소리를 듣기 싫어하는 부모는 이 세상에 없을 거라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어느 나라건 교육열은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유독 우리 사회의 교육열이 정부가 부동산 규제까지 해야 할 정도로 과열현상을 보이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대책없는 평등, 과연 옳은 길인지… 30년 전이던가? 영국의 어느 신문 칼럼에서 세계에서 가장 평등하게 교육 받을 수 있는 나라가 한국이라고 한 내용을 우리나라 신문이 인용해서 게재한 것을 읽은 적이 있다. 그 칼럼은, 한국의 대학입시는 비록 경쟁이 치열하지만 가난한 집 아이도 머리가 좋고 공부만 잘하면 얼마든지 좋은 대학에 갈 수 있고, 그로해서 자신의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어서 한국만큼 교육의 기회가 평등한 사회는 지구상의 어디에도 없다는 요지였다. 그 때에는 그랬다. 개천에 용 나듯, 시골 출신 수재들이 소위 서울의 명문대학에 어렵지 않게 진학할 수 있었고, 그렇게 진학하여 가정교사 등으로 학비를 벌어 공부했던 인재들이 출세하여 현재의 우리 사회를 이끌어가고 있다. 영국 신문에서 말했듯이 그 결과를 놓고 보면 정말 한국은 교육만큼은 신분의 구분 없이 세계에서 가장 평등했던 것이 틀림없다. 그게 교육열 과열의 이유가 되었던 게다. 그런 우리 교육이 요즘 와서 마냥 난도질당하고 있다. 대책 없이 평등을 추구하다보니 이제는 대학마저 평준화해야 한다는 사회주의식 주장이 여기저기서 나타나고 있다. 찍기나 잘하고 실수만 없으면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는 수능으로, 그것도 이제는 실점수도 아니고 9등급으로만 나눈 성적으로 학생을 뽑으라는 것은 대학의 차별을 없애서 명문대를 물 타기 하려는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 교육당국이 대학에 대하여 변별력도 없는 수능 등급으로만 학생 뽑기를 강요하니까 대학이 묘안이든 꼼수든 자신의 환경에 맞는 입시 방법을 찾으려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입시에서 아무 자율권이 없는 대학은 더 좋은 학생을 뽑기 위해서 온갖 수법을 다 동원하고 교육 당국은 이를 제지하려고 하고 있다. 그것이 국민들 눈에는 서로 치고 박고 숨바꼭질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경쟁력의 초석은 '대학자율' “‘100분의 1’의 학생을 뽑으려 하지 말고 ‘10분의 1’의 학생을 뽑아서 잘 가르치라”는 대통령의 말에서 보듯, 지금 우리 정치권은 대학을 그런 시각으로 보고 있다. 그러면서도 우리나라에 세계적 수준의 대학이 없다고 푸념 하고 있다. 잘 가르치는 것도 좋은 학생을 두고 잘 가르쳐야지 덮어놓고 잘 가르치면 된다는 사고방식은 교육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천민적인 위험한 발상이다. 입시든 교육이든 대학에서는 자율이 우선되어야 경쟁력이 길러진다. 그런데 자율을 갖고 무얼 좀 하려는 대학을 두고 이참에 그 대학을 손 좀 보겠다는 국회의원도 있었으니 정치가 우리 교육을 농단하는 것으로 밖에 보여 지지 않는다. 명문대보다 비명문대 학생 수가 훨씬 많으니, 그런 다수의 불만을 등에 업고 선동적 포퓰러즘에 빠져 단견과 편협함을 보이는 정치권이 우리 교육을 망칠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 교육을 구할 수 있는 길은 자율적 경쟁체제를 보장하고 명문대를 인정해주고 지원해주는 것이다. 어차피 세상은 경쟁을 해야 살아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라를 망하게 하려하지 않으려면 절대로 정치논리로 교육을 농단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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