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가인증의 시대다. 대학총장의 경영 평가가 재정지원사업 실적으로 매겨지는 세상이다. 평가지상주의가 팽배한 대학사회에서 평가에 ‘이로운가’와 ‘불리한가’는 중요한 판단 기준으로 작동하고 있다.

지금 대학재정지원 사업평가 제도는 문재인 정부 작품이다. 정부는 출범 초기 “대학 평가 및 재정지원사업 전면 개선으로 대학의 자율성과 공공성을 높인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대학재정지원사업을 일반재정지원사업인 ‘대학기본역량진단’과 일부 특수목적사업으로 개편했다.
 
개편 이유는 “대학교육의 질적 수준을 높여 대학이 대학답게 발전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는 데 있었다. 하지만 대학현장에서 벌어지는 양상은 오히려 정반대로 가는 듯하다. 평가를 통해 대학이 대학답게 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대학 본연의 임무인 교육과 연구를 더욱 어렵게 하고 있으니 말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대학재정지원 사업의 명칭이 바뀌고 그 기조 또한 변경된다. 중간에 장관이라도 바뀌면 또 한바탕 홍역을 치른다. 한 푼이 새로운 대학 입장에서 정부 재정지원은 가뭄 끝에 단비 노릇을 하기에 정부의 현란한 춤사위에 장단을 맞출 수밖에 없다. 평가 잘 받는다고 명문대학이 되는 것도 아닌데 평가에 올인하는 대학을 볼 때마다 안쓰러움을 느낀다.

세상을 송두리째 흔들어놓고 있는 코로나19도 정부 재정지원사업인 3주기 대학기본역량진단의 수레바퀴를 멈출 수 없는 모양이다. 지금 대학현장은 3주기 기본역량진단 준비로 비상이다. 온라인개학을 필두로 비대면교육이 일상화되고 있는 현실에서 적절한 대응력을 키우는 데 역량을 집중해도 모자랄 판인데 대학은 3주기 대학기본역량진단에 올인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코로나19로 대학재정지원사업의 전면적인 개편을 기대했던 대학 현장의 목소리는 평가의 도도한 흐름에 묻히고 있다. ‘AC(After Corona19)’ ‘BC(Before Corona)’ ‘New Normal’이란 말이 회자될 만큼 심각한 상황인데, 재정지원사업을 관장하는 정책당국의 변화는 찾아볼 수 없다. 대학현장의 고충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는 정책당국의 무감각에 혀를 내두를 정도다. 

지금의 대학평가 제도는 현재는 물론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대학역량을 심각하게 갉아먹고 있다. 대학사회의 모든 것이 변해가고 있지만 변하지 않는 한 가지는 ‘평가준비를 위해 대학본부의 불이 꺼지지 않는 풍경’이다. ‘밤새 불 밝힌 연구실과 도서관’의 정경은 어느새 ‘대학본부의 희미한 불빛’으로 대체됐다. 이들에게는 토요일, 일요일이 없다. ‘월 화 수 목 금 금 금’ 새로운 요일표만 있을 따름이다.

교육은 뒷전이고 당장 평가에 유리한 사업을 실행하고 후속 서류 작업을 준비해야 한다. 대학마다 평가 시 준비해야 할 증빙서류들이 1톤 트럭 한 대 분량은 된다 하니 이들의 노고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평가대비 서류작업에는 엄청난 시간이 소요된다. 대학본부는 물론 전체 학과까지 동원돼야 가능한 작업이다. 

평가준비에 묻혀 사는 사업지원 교수와 직원들을 볼 때마다 지금의 평가제도의 모순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먹먹할 따름이다. ‘교육의 질 향상을 위한 평가’가 돼야 하는데 ‘평가를 위한 평가’라는 판단이다.

한 교육단체의 분석에 따르면 대학 재정지원사업의 종류도 많고 한 사업당 금액이 커지면서 대학은 부족한 재정 확충과 학교 홍보를 위해 재정지원사업을 따내기 위해 심혈을 기울일 수밖에 없다고 한다. 대학 간 경쟁이 너무 과열돼 교수들 사이에서는 대학이 사업하느라 교육하고 연구할 시간이 없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란다. 정부가 목표로 한 재정지원사업을 위한 평가가 대학현장의 이런 모습을 원했다면 ‘성공’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아니지 않은가? 주객(主客)이 전도(顚倒)된 느낌이다.

대학혁신을 부르짖고 있는 마당에 대학평가가 발목을 잡고 있는 형국이다. AI, Big Data, VR, AR 등 4차 산업혁명의 신기술이 속속 교육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이 대전환기에 ‘평가준비’가 아니라 ‘대학혁신’이 가장 중요한 화두가 돼야 한다.

하지만 평가가 대학혁신의 발목을 잡고 있으니 답답할 노릇이다. 정부가 나서 이 족쇄를 풀어야 한다. 지금의 획일적이고 구태의연한 평가 틀을 포뮬러에 입각한 일반재정지원으로 바꿔야 한다. 아울러 대학이 자기 특성에 맞는 특화발전 전략을 추진해갈 수 있도록 대학별 지원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AI시대 교육도 빅데이터 기반 개별 맞춤형 학습으로 전환돼 가고 있지 않은가? 교육당국의 분발을 기대한다. 평가준비를 위해 들이는 노력과 비용을 대학혁신에 쏟아 부을 수 있도록 평가자체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꿀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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