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무현 한양여대 실용음악과 교수
희대의 명곡, 가수 김완선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 작곡
전문대학평생직업교육발전협의회(COLIVE) ‘홍보송’ 제작 재능나눔 동참

손무현 한양여대 실용음악과 교수.(사진=이중삼 기자)
손무현 한양여대 실용음악과 교수.(사진=이중삼 기자)

[한국대학신문 이중삼 기자] “최근 전 세계가 상생, 화합, 융합을 얘기한다. ‘COLIVE 재능나눔 캠페인’ 참여 계기로 앞으로 더 좋은 나눔의 기회가 있다면 재능을 더 발휘해 필요한 곳에 공유하고 싶다.”

손무현 한양여대 실용음악과 교수는 1990년대 가요계를 휩쓸었던 작곡가이자 기타리스트다. 1987년 가수 임재범과 밴드 ‘외인부대’로 데뷔한 그는 고등학교 3학년에 ‘정식 데뷔’라는 꿈을 이뤘다. 특히 그는 1990년 가수 김완선 5집에 수록된 곡 가운데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를 작곡해 당시 앨범이 100만장 이상 판매되면서 가요계의 입지를 다졌다. 그는 가요뿐 아니라 영화·드라마 등 OST에도 많은 명곡을 남기기도 했다. 지난해 7월에는 1993년 2집 이후 27년 만에 발매한 앨범 ‘TEAM SOHN’으로 33년의 음악 인생을 담아냈다. 

큰 명성을 가지고 있는 손무현 교수는 ‘봉사활동’도 꾸준히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로터리 클럽’이라는 자선단체의 회원으로 매달 단체에 나가 독거노인가정을 방문해 청소·음식 등 소외계층 봉사에도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런 그가 ‘전문대학평생직업교육발전협의회(COLIVE)’가 추진하고 있는 ‘전문가 재능나눔 캠페인’에도 동참했다. 지역 재능나눔 전문가를 발굴하고 이들의 활동을 지원해 지역발전을 유도하는 캠페인에 보탬이 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는 COLIVE의 음악에 대한 재능나눔으로 ‘홍보송’을 만들었다.

전문가 재능나눔 캠페인에 참여한 손 교수를 24일 한양여대에서 만났다. 손 교수의 ‘음악 인생’ 이야기와 함께 ‘재능나눔’을 동참하게 된 계기와 앞으로의 계획을 들어봤다. 

■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난 손 교수… 고3 때 ‘정식 데뷔’ = 손무현 교수는 음악이 항상 흘러나오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이 세 명의 누나들에게 음악 공부를 시켰고 매일 집안에서 누나들의 연주 연습 소리가 가득했다고 한다. 손 교수는 “저는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흥이 많으신 분이셨다. 클래식·가요·팝 등 음악을 듣는 것을 좋아하셨다”며 “그래서 누구보다 음악을 쉽고 빠르게 접했던 것 같다. 선율이 귀에 들리는 것들이 굉장히 자연스러웠다”고 말했다. 이어 “사실 처음에 부모님은 누나들만 음악 공부를 시키고 저는 공부하라고 했다. 하지만 누나들보다 음악을 좋아했고 열망이 컸다. 특히 초등학교 시절에는 팝 음악에 매력을 느껴 많은 정보를 얻으려고 노력했다”고 설명했다. 

자신의 ‘음악 인생’은 중학생 시절부터 시작됐다고 회상했다. 록 음악을 좋아하는 친구가 집에 일렉트로닉기타가 있다는 말을 듣고 구경을 갔다가 ‘확신’이 들었다고 했다. 그는 “기타를 본 순간 마치 평생의 반려자를 만난 기분이 들었다. 바로 음악을 해야겠다는 확신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 뒤로 어머니에게 음악을 공부하겠다고 선언했다. 공부를 하면서 음악을 독학하기 시작했다. 중학교 3년 내내 음악을 공부하다 보니 강남에서 기타를 꽤 치는 학생이 있다는 소문이 날 정도였다고 한다. 

중학교 시절 음악에 대한 은인을 만났다고 했다. 록 음악의 대부인 기타리스트 신중현 씨의 아들 대철·윤철 형제를 만난 것이다. 그는 “스쿨밴드 연습을 끝낸 후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다음 연습 차례가 신중현 씨의 아들들이라는 말을 듣고 구경하게 됐다”며 “강남에서 내가 최고라고 생각했는데 이들의 무대를 보고 돌로 머리를 강하게 맞은 느낌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어 “그 뒤로 형제들과 가깝게 지내게 됐다. 이들 집으로 놀러 가면 그 어떤 책과 강의보다 실질적이고 소중한 정보들이 가득했다. 고등학교 3년 동안 발전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됐다. 이들을 은인이라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손 교수가 고3이었을 때 데뷔의 기회가 찾아왔다. 당시 가수 임재범이 새 밴드를 구성하면서 기타리스트를 찾았고 손 교수에게 스카우트 제의를 해왔던 것이다. 그렇게 1987년 임재범이 만든 헤비메탈 그룹 ‘외인부대’라는 밴드로 ‘정식 데뷔’를 하게 됐고 본격적인 음악인생이 시작됐다.

■“가수 김완선은 내 은인”… 가요계 입지 다져 = 데뷔 후 그룹 활동을 해오던 그는 록에서 가요로 관심이 옮겨갔다. 그는 “주도적으로 음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록 음악에서 방향을 틀어 가요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세션기타리스트 생활을 2~3년 동안 하는 차에 가수 김완선 사무실에서 연락이 왔다고 했다. 김완선의 새 앨범과 관련해 밴드 형태로 홍보를 하고 싶다며 함께하자는 제안이 왔다. 그는 “김완선은 지금으로 따지면 이효리 정도의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특히 당시 김완선 사무실에 있던 사장님이 내게 막연한 신뢰를 줬다”며 “곡을 써보라는 말에 쓴 곡이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였다”고 말했다. 89년에 앨범 준비를 시작해 90년에 앨범이 나왔다. 곡은 나오자마자 1위를 하고 앨범이 100만장 이상 팔리면서 가요계 입지를 다지게 됐다.  

손 교수는 “가수 김완선과 작업을 해 100만장이라는 기록을 세운 것은 잊을 수 없는 소중한 기억이다. 김완선도 나의 은인”이라며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는 자식 같은 곡”이라고 말했다. 이어 “내 인생에 똘똘한 곡 하나는 만들었구나 하는 자부심이 들며 영원히 불릴 수 있는 음악을 만들어서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음악 인생’을 한마디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과도 같은 존재’라고 표현했다. ‘애증’이라고도 했다. 그는 “뭔가를 끊임없이 창작해야 하는 예술가와 훌륭한 제자를 키워내야 하는 교수라는 두 가지 일을 하다 보니 고통과 기쁨이 공존하는 애증인 것 같다”고 말했다.  

■“전문대 교직원으로서 ‘재능나눔 캠페인’ 동참은 당연” = 전문대에서 일 하는 사람으로서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뭔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손 교수에게 마침 COLIVE에서 재능나눔 캠페인에 함께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그는 “COLIVE에 걸맞은 홍보송을 제작해주면 좋을 것 같다는 제안을 받고 희망적인 곡을 만들어서 행사 때마다 사용할 수 있도록 기쁜 마음으로 만들게 됐다”고 설명했다. 곡의 제목은 ‘하나 되는 날’이며 내용은 ‘상생’과 ‘화합’을 표현한 곡이다.

그는 “재능나눔은 상업행위가 아니다. 전문대 교직원이라는 신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좁게는 학교 안에서의 화합, 넓게는 전문대 전체의 화합을 생각하면서 참여했으면 좋겠다”며 “비즈니스차원이 아니라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능을 남김없이 나눔을 했으면 좋겠다. 결국 그것이 스스로를 뿌듯하게 만드는 길이라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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