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희 전남도립대 교수(국가교육회의 고등직업교육개혁위원회 전문위원)

한강희 전남도립대 교수(국가교육회의 고등직업교육 개혁위원회 전문위원)
한강희 전남도립대 교수(국가교육회의 고등직업교육 개혁위원회 전문위원)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나태주, 풀꽃)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정현종, 방문객)

“대추가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천둥 몇 개, 벼락 몇 개”(장석주, 대추 한 알)

“먼 데서 바람 불어와 풍경 소리 들리면 보고 싶은 내 마음이 찾아간 줄 알아라”(정호승, 풍경 달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며 피었나니”(도종환, 흔들리며 피는 꽃)

“떠나라 낯선 곳으로, 그대 하루하루의 낡은 반복으로부터”(고 은, 낯선 곳)

“너에게 묻는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안도현, 너에게 묻는다)

위 시편들은 광화문 네거리 대형 건물에 현수막으로 내걸렸던 현존 시인들이 쓴 인구에 회자된 작품들이다. 낮은 음성으로 조곤조곤 낭송해 보시라. 코로나19로 인한 갑갑한 마음을 치유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성 싶다. 11월 1일은 유네스코가 제정한 ‘세계 시의 날’(World Poetry Day, 3월 21일)에 견줘 우리 스스로 제정한 ‘한국 시의 날’이다. 두루 알다시피 시는 말과 사물을 매개로 해 세상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짐으로써 새로운 인식과 이해에 이르게 하는 최상의 문학장르다. 시적 언어의 산출은 간결하게 응축된 은유와 상징을 통해 부단히 세상과 대화를 촉진시킨다. 시적 언어를 통한 독자와의 대화는 다양성, 개연성, 자유와 자재, 상상력의 극한을 드러내거니와 이를 가리켜 시정신이라 할 만하다.

사색의 계절인 가을을 가리켜 등화가친의 계절이라고 하는 이유는 가을이 부여하는 풍요로운 결실만큼 시 한 줄, 시집 한 권쯤 가슴에 안고 시적, 문학적 상상력을 확장시켜 보라는 주문은 아닐까. 세계 시의 날은 1999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30차 유네스코 회의에서 제정됐다. 이 날을 제정한 목표는 시적 표현을 통해 언어의 다양성이 증진되도록 하는 단순한 목적에서 출발했다. 우리의 경우 ‘시인의 나라’ 답게 1987년 ‘한국 시의 날’을 제정해 올해 35주년을 맞는다. 육당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 즉 최초의 신시가 1908년 소년지에 발표된 날로부터 110주년을 맞이하는 날을 기념한 것이라고 한다. 한국현대시인협회 권일송 이사장과 소년한국일보 사장이었던 김수남 선생의 발의로 시작됐다.

시의 날 선언문에는 ‘시는 삶과 꿈을 가꾸는 언어의 집이다. 우리는 시로써 저마다의 가슴을 노래로 채워 막힘에는 열림, 어둠에는 빛, 끊어짐에는 이어짐을 있게 하는 슬기를 얻는다’고 적시돼 있다. 시의 날을 기념하는 또다른 문건에는 좀더 구체적으로 ‘시는 한 나라의 얼과 혼에 불을 지피는 일이다. 정치가가 시를 읽고, 아이들이 시를 읽고, 노동자들이 시를 읽으며 삶의 가치를 지향해야 한다’고 적혀 있다. 

시는 난해한 추상의 언어가 아니다. 전공자들끼리만 향유하는 전유물도 아니다. 시 읽기는 이해가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있는 그대로의 느낌으로 즐기면서 영혼을 살찌우는 가장 효율적인 문화도구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가장 고급스런 문자행위인 것이다. 공자가 설파했듯이 시는 한마디로 ‘생각하는 데 사악함이 없기(思無邪)’때문에 마음을 정화(淨化)하는 데도 안성맞춤이다. 

공자는 시를 두고 ‘즐겁되 음탕하지 않고, 슬프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는 것’이라 부연하기도 했다. 시는 나이를 묻지 않는다. 2013년 102세로 세상을 등졌던 일본의 최고령 시인 시바타 도요는 99세에 ‘약해지지마’ 라는 시를 내놓아 기염을 토했다. ‘있잖아, 불행하다고 한숨짓지마 / 햇살과 산들바람은 한쪽 편만 들지 않아 / 꿈은 평등하게 꿀 수 있는 거야 / 나도 괴로운 일 많았지만 살아 있어 좋았어 / 너도 약해지지마’라고.

시를 통해 ‘내 안의 나’와 ‘겉으로 드러난 나’를 인지하고 성찰하는 일은 인간 삶의 고매한 일에 속한다. 폴 발레리가 읊조린 ‘아,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겠다’라는 명구를 이렇게 패로디 해 본다. 

‘아, 바람이 분다. 시 한 수 읽어봐야겠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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