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이 화두고 대세다. 지금처럼 청년이 대접받고 귀하게 여기는 시절이 또 있었나 싶다. 물론 이제껏 소홀한 대상이었다는 것이 아니라 일생에서 지나는 시절을 돌이켜보면 교육은 초중등이 중심이었고 사회는 늘 연륜, 경험 등을 앞세운 노마지지를 중요시 하면서 청년은 ‘돌을 씹어도 소화할 나이’ 쯤으로 여겼던 것이 사실이다.

어찌됐든 나라가 위기에 처하거나 고난과 역경에 시달릴때면 항상 선두에 나선 것은 청년이다. 근대사적으로 일제 식민지 시절 항일운동에 앞장 선 의병활동이 그랬고 가장 최근으로는 80년대 민주화운동이 그랬다. 1970년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던 전태일 열사가 분신하던 때가 23살이었고 1987년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최루탄에 맞아 숨진 이한열 열사의 나이가 22살이었다. 성년으로 들어선지 불과 두 세살때의 일이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청년이야기 하다말고 갑작스레 요절한 열사의 이야기를 왜 끄집어낸고 하니. 흔히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복을 받는 사람을 두고 우스갯소리로 ‘전생에 나라 좀 구했나봐’라는 소리를 한다. 불교에서 얘기하는 삼생을 기준으로 금생이 아닌 전생 얘기는 어디서나 등장한다.

개연성은 떨어지지만 한 사람을 놓고 보면 전생에 어떻게 살았느냐가 금생을 결정하고 가문으로 보면 조상들의 선행이 후손들에 미치는 영향이 우리의 잠재의식 속에 있다. 일종의 세대를 놓고 보면 앞서 작고한 청년들의 희생과 노력으로 현재의 청년이 복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다소 허무맹랑한 얘기일 수 있지만 작금의 청년들이 받고 있는 황송한 대우를 보니 문득 그렇다.

지금 정치권은 너도나도 청년 찾기에 혈안이다. 지난 6월 100석 이상을 가진 제1야당의 당대표가 30대로 뽑히는 전무후무한 일은 2030의 표심이 아니었으면 있을 수 없는 이벤트였고 그보다 두달 앞선 4월 재보선에서는 젠더 이슈가 있긴 했으나 2030의 표심으로 정당 득표율이 달라지면서 급기야 청년 세대의 표심이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각당의 청년층에 대한 뜨거운 구애는 공동선대위원장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동안은 정치 경력이 화려한 나이 든 정치인의 자리로만 여겨졌던 선대위원장에 20대 대선에서는 청년들이 여야 공히 공동선대위원장 자리를 꿰차고 들어가 있다. 역대 청년들이 선대위에 청년 표심을 대표해 들어간 적은 있지만 선대위원장급으로 자리를 차지한 것은 보기 드물었다. 아마 있었어도 상징적인 의미 그 이상은 아니었다.

그도 그럴것이 최근 대통령 후보들의 각종 여론조사를 보면 청년 표심에 각당의 지지율이 좌지우지되는 일이 벌어지면서 막강한 캐스팅 보트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40대 이상은 진보와 보수로 확연히 나뉘어져 있지만 2030세대는 그야말로 자신들의 입장을 대변해주는 실속있는 선택을 하면서 후보들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하고 있다. 언제든 지지후보를 바꿀 수 있는 부동층의 대다수도 이제는 청년층이 차지하고 있어 후보들이 꽤나 속좀 태울 듯 하다.

지금 청년들은 전방위적으로 관심이 많다. 풀어나가야 할 숙제들로 사면초가이기 때문이다. 시기적으로 보면 취업 문제든 주거 문제든 각기 다르게 불거졌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일자리 문제도 있고 결혼으로 인한 집 문제도 당면한 과제다. 집값이 급등하면서 자가 소유는 언감생심이다. 도무지 결혼도 넘어야 할 산이지만 산을 넘어도 출산이라는 더 큰 산이 기다리고 있다. 정말 힘들다. 동시다발적으로 문제가 벌어진 힘든 이 때에 정치권이 청년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어떤 정책도 청년 우선으로 하는 것은 한줄기 빛이 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권은 ‘저쪽 청년보단 우리 청년이 더 낫다’는 유치한 싸움을 하고 있으니 눈살이 절로 찌푸려진다. 청년은 그동안의 세월에 성숙해지고 급변하는 상황에 적응하느라 늘 힘든데 정치권은 언제나 철이 들지. 부디 이번에는 적어도 청년 정책과 관련해서는 말 뿐이 아닌 행동으로 여야가 공감대를 형성해 청년이 행복한 나라가 됐으면 한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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