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규택 계명문화대 교수

조규택 계명문화대 교수
조규택 계명문화대 교수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의 막하 인물에는 한자가 다른 동명이인 이순신(李純信, 1554-1611)이 있다. 무의공 이순신은 1592년 7월 8일, 한산도 해전에서 일본 함대를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할 때 판옥선 5~6척을 이끌고 선봉에서 맹활약했다. 돌아 나올 때 무의공이 최후에서 나오는 바람에 적선이 따라붙을 정도로 아슬아슬하기도 했다.

덕수 이씨인 충무공과 달리 전주 이씨인 무의공은 종실 양녕대군의 후손이다. 자는 입부(立夫)이며 어려서부터 학업보다는 무예에 특출했다. 무의공은 당시로서는 이른 나이였던 25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 온성 판관, 의주 판관을 거쳐 혜산진 첨절제사가 되어 오랑캐를 무찔렀다. 그러다 모략을 받아 변방 장수 이억기(李億祺)와 함께 파면되었다가 다시 방답첨사로 임명되면서 충무공의 막하 인물이 된다.

무의공은 1592년 1월 10일에 방답진에 부임한다. 충무공이 전라좌수사로 임진년(1592) 2월 19일부터 27일까지 9일간 휘하의 주요 군진인 5포를 순회‧점검하기 직전이었다. 이 충무공이 실시했던 9일간의 순회를 『난중일기』에서 살펴보면 19일, 백야곶에 도착하니 순천부사 권준이 마중 나왔고, 여도만호진의 전비태세를 검열. 20일에 점검을 계속, 전선은 새로 만들어 좋았고 무기 상태도 좋았다. 21일 흥양에서 현감 배흥립과 활쏘기, 조방장 정걸 등과 회식. 22일 흥양 선소(船所)의 배와 집기류 점검. 정운이 지휘한 녹도만호진에 도착해 방비 태세를 점검, 화포 발사 시범 후 회식. 23일 우중에 발포진에 도착해 전비 태세 점검, 발포진은 충무공이 한 때 만호로 재직했던 곳이다. 24일, 우중에 사도진에 도착해 전선을 점검, 25일 사도진 점검 결과 전비 태세가 가장 허술해 첨사를 잡아들이고 책임자를 처벌함. 26일 여수시 돌산읍 군내리의 방답진에 도착해 점검한 결과 장전과 편전은 불량하나, 전선은 양호함. 첨사는 새로 부임한 무의공 이순신이다. 27일 방답진의 성지(城地)를 점검한 결과 엉성했다. 이상을 종합하면, 충무공은 철저한 지휘관이었고 무의공이 막 부임한 방답진의 전비 태세는 열악했다.

그러나 충무공은 전쟁 준비에 애쓰는 무의공의 모습을 보면서, 그를 크게 신뢰해 핵심 참모로 기용한다. 충무공은 첫 출전이던 옥포해전에서 무의공을 함대의 가장 중요한 직책인 중위장(中衛將)으로 중용해 공을 세우게 한다. 그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절충장군(정3품, 당상관)이 되었으며 곧 충청수사로 영전한다. 다만, 무의공은 청렴하고 정확‧공명정대했던 이 충무공과 달리 성격이 교만하고 재물을 탐하여 탄핵받는다. 이로 고령진 첨사로 좌천되어 1년을 보내지만, 다시 추천되어 유도방호대장으로서 서호(수원)에 주둔하며 서울의 방어를 책임지기도 한다. 충무공은 활쏘기에 뛰어났고 용맹했던 무의공의 무공을 높이 평가해 자주 그를 조정에 천거한다.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이 이끌던 수군이 전멸함에, 충무공이 다시 통제사로 복직하자 무의공도 경상우수사로 등용된다. 결사항전한 노량해전에서 무의공은 척후장(斥候將)의 임무를 수행하며 일본 군선 10여 척을 격침 시킨다. 충무공 전사 후, 임시 통제사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해 노량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선무공신 3등에 책봉되었으며, 광해군 때 58세로 군영(軍營)에서 순직했다. 인조는 그에게 좌찬성을 증직하고 무의(武毅)라는 시호를 내린다. 대한민국 해군은 무의공 이순신을 209(장보고)급 잠수함 7번함(SS-68)으로 명명해 그를 기리고 있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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