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10년간 반도체 인재 15만 명 양성…반도체학과 정원 확대, 민관 공동 연구 개발 사업 등 추진
대학가, 반도체학과 등록 포기 현상 심각…대기업 연계 반도체학과 4개대 정시 등록포기율 155.3%
서연고 정시모집 자연계열 최초 합격자 33% 등록 포기…의약학 계열 진학 추정, 의대 이탈 현상 심화
정부 의대 정원 확대 논의 중…“핵심산업 기여한다는 자부심·경제적 이익 수반되는 정부 정책 절실”

반도체 공정 실습 캠프 진행 모습.
반도체 공정 실습 캠프 진행 모습.

[한국대학신문 임지연 기자]  정부가 반도체 인력 부족을 해소하기 위해 10년간 반도체 인재 15만 명을 양성하겠다고 밝히며 총력을 기울이고 있으나 정책적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대학가에선 반도체학과 등록 포기 현상이 나타나고, 등록 포기자 상당수가 의대로 진학한 것으로 분석돼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또한 보건복지부가 부족한 의료인력 확충 및 지역별·과목별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의대 정원 확대를 추진하고 있어 정원이 증원된다면 이공계생의 의대 이탈은 더욱 심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 정부, 반도체 인력 양성 총력…10년간 반도체 인재 15만 명 양성 = 반도체는 한국 총수출액의 약 20%를 차지하고 있으며, 2021년까지 9년째 수출액 1위를 유지하고 있는 국가 제1의 산업이다. 또한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IoT), 자율주행차 등 미래 과학 산업 핵심 부품으로 AI 실현을 위한 AI반도체도 주목받고 있는 실정이며, 최근 AI 챗봇인 ‘챗GPT’ 열풍이 불고 있어 반도체 업황의 주목도가 높은 상황이다. 이렇듯 반도체 분야는 고급·전문인재의 수요가 많은 분야임에도 석·박사급 고급인재가 부족 문제가 꾸준히 제기돼 왔다. 기업에서 활용할 수 있는 석사 이상의 고급인력이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에 지난해 정부는 대학 반도체 관련학과 신증설을 통해 정원을 늘릴 수 있도록 하는 등 규제를 풀어 10년간 반도체 인재 15만 명을 키우겠다고 발표했다. 첨단 분야 겸임·초빙교원 자격요건을 완화하고 석사, 학사, 직업계고 등 반도체 관련학과 정원을 늘린다는 것이다.

또한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과 민관 공동 연구 개발 사업을 통해 총 사업비 2228억 원을 투자, 10년간 실전형 고급 인재 2400여 명을 양성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그 일환으로 지난달 23일에는 산업통산자원부와 삼성전자, SK하이닉스, 한국반도체산업협회, 한국산업기술평가관리원 등이 참여한 반도체 석박사 고급인력양성을 위한 민관 공동투자 유치 체결식도 진행됐다.

지난달 28일에는 교육부가 반도체 특성화대학 8곳 선정해 반도체 인재 양성에 540억 원 지원하는 ‘반도체 특성화대학 재정지원 기본계획(안)’을 발표했다. 대학당 연간 배출 가능 인재 최소 50명으로 잡아 연간 400명 이상 반도체 분야 전문 인재 배출한다는 계획이다.

최은희 교육부 인재정책실장은 “반도체 분야가 산업과 연계돼 있어 호황, 불황 등에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있는데, 관련 범부처가 산업계와 긴밀하게 협업해 모니터링 하면서 지속적으로 운영 가능하도록 할 계획”이라며 “대학이 반도체 특성화대학 사업으로 대학의 특성과 강점을 반영한 다양한 반도체 인재양성 모델을 제안하고 실현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교육부도 대학이 반도체 인재 양성의 핵심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 대학가, 반도체학과 등록 포기 현상 심각…의약학 계열 진학 추정 = 하지만 이런 정부의 대책에도 반도체 업계 인력 부족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을 전망이다. 대학가에서는 반도체학과의 등록 포기 현상이 심각한 수준이기 때문이다.

최근 종로학원이 분석한 2023학년도 주요대학 반도체학과 정시 추가합격 분석에 따르면, 대기업 연계 반도체학과 4개 대학 정시 등록포기율은 모집인원 47명 대비 155.3%로, 서연고 자연계 전체 등록포기율 33.0%보다 크게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최초 합격자 등록포기율은 연세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 130.0%, 고려대 반도체공학과 72.7%, 서강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 80.0%, 한양대 반도체공학 275.0%였다. 특히 SK하이닉스와 계약한 한양대 반도체공학과와 삼성전자와 계약한 연세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는 최초 합격자 모두 이탈했다.

2024학년도부터 서울대에서 신설·운영될 예정인 ‘시스템반도체공학’ 전공에 대한 전망도 비관적이다. 서울대 시스템반도체공학 전공은 기업 취업을 보장하는 타 주요 대학 계약학과와 달리 일반학과로 개설되기 때문이다. 서울대 역시 이공계생의 등록 포기 현상이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는 대학 중 한 곳이다.

종로학원에 따르면, 2023학년도 서울대·고려대·연세대(SKY) 정시모집에서 자연계열 최초 합격자 가운데 33%(737명)이 등록을 포기했다. 지난해 이들 대학의 자퇴생(1874명) 중 75.8%(1421명)도 자연계열이었다.

임종호 종로학원 대표이사는 “등록포기자의 상당수와 자퇴생 대부분 의대, 치대, 한의대, 수의대, 약대 등 의약학 계열에 진학했을 것이라 추정된다”며 “삼성전자, SK하이닉스와 관련된 반도체 관련학과 상황으로 볼 때 대기업과 연계되지 않은 대학들의 반도체 관련학과의 선호도도 불투명하다”고 지적했다.

한 입시업계 관계자는 “자연계열 최상위권 대입은 ‘의대와 나머지’로 갈리는 분위기”라며 “최근 나오는 통계들 모두 ‘의대 쏠림 현상’을 보여주는 예시”라고 짚었다.

1일 국회 교육위원회 소속 민형배 의원실에서 발표한 수험생 선호도가 높은 9개 국립대·9개 수도권 사립대 ‘2020~2022학년도 의대 정시 합격자 현황’을 보면, 3년간 의대 정시 합격자 중 N수생 비율은 78.7%였다. 연도별 N수생 합격자 비율은 큰 변화를 보이지 않았지만, N수생 중 3수생 이상 비율은 2020학년도 29.0%에서 2022학년도 41.9%로 급증했다.

서연고의 경우 서울대 의대의 지난해 정시 합격자 중 N수생의 비율은 71.0%였다. 3수생 이상의 비율도 41.9%다. 연세대·고려대 의대 N수생 비율은 각각 72.3%, 77.8%였다.

■ 정부, 의대 정원 확대 논의 중…이공계생 의대 이탈 현상에 영향 미칠까 = 이공계생들의 의대 쏠림 현상이 심화되고 있는 가운데, 정부가 부족한 의료인력을 확충하고 지역별·과목별 불균형을 해소하는 차원에서 의대 정원 확대를 추진하고 있어 정원이 증원된다면 이공계생의 의대 이탈은 더욱 심화될 전망이다.

정부는 2020년 지역 의료 격차 해소를 위한 ‘의대 정원 한시적 증원 방안’을 발표하고, 의대 정원인 3058명을 2022학년도부터 최대 400명 늘려 10년간 4000명을 한시적으로 유지하겠다고 밝혔다. 의대 정원 확대 배경으로는 우리나라 의사 수를 꼽았다. 현재 국내 의사 수는 13만 명이지만 실제 활동 의사 수는 10만 명으로, OECD 평균 약 16만 명에 못 미친다. 지역 간 의료 편차도 심하다. 서울은 인구 천 명당 의사 수가 3.1명인데 비해 경북은 1.4명, 충남은 1.5명 수준이다.

이에 대학가도 의대 정원 확대로 들썩였다. 지역 의원들은 해당 지역구 대학에 의대 신설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대학에서는 정치권의 움직임에 발맞춰 의대 설립을 위한 TF를 구성하는 등 분주한 상황이다. 최근 창원대, 공주대, 목포대, 순천대, 안동대 등 5개 국립대는 공동주관으로 ‘지역공익의료인력 확충을 위한 권역별 국립대학교 의과대학 설립 공동포럼’을 개최해 의대 유치를 위한 협력을 도모하고, 국립대 의과대학 설립 필요성 및 공익의료 서비스 확대 촉구를 위한 공동건의문을 채택하기도 했다.

반도체학과를 운영하고 있는 A대학 관계자는 “온라인 커뮤니티만 봐도 현재 다니고 있는 대학을 그만두고 의대 진학을 준비 중이라는 글이 쉽게 눈에 띈다”며 “현재 운영되고 있는 학과도 등록 포기자가 속출하는 상황이며 우수한 학생들이 의대로 몰리고 있는데, 의대 정원이 늘어난다면 이공계생의 의대 이탈 현상은 더욱 심화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B대학 관계자는 “의대 쏠림 현상을 막을 수 없는 상황이라면 조금 더 구체적이고 획기적인 인재 양성 방안이 강구돼야 하는데, 정부는 학과과 모집정원을 늘리는 것에만 치중하는 것 같다”며 “반도체 분야가 고연봉·안정성이 보장되는 의대보다 비전이 있다는 것을 학생들에게 인지시킬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업계 관계자들은 핵심 산업에 기여한다는 자부심과 경제적 이익이 수반되는 정부 정책의 필요성과 확실한 예산 지원을 강조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최근 진행된 한림대 도원학술원 학술심포지엄에서 “대학에서부터 의대를 선호하는 경향이 짙어 전문 역량을 갖춘 인재를 찾기 힘들다”며 “국가경제의 한 축을 책임지는 핵심 산업에 기여한다는 자부심과 경제적 이익이 수반되는 정부 정책이 필요하다”고 전했다.

박재근 한국반도체디스플레이기술학회장(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교수)은 “현장에서 예상하는 필요 인재 수와 괴리가 큰 만큼 더 많은 예산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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