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우 가천대 석좌교수

이기우 석좌교수.
이기우 가천대 석좌교수.

현재 우리나라 교육에서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일까? 국민들이 더 이상 교육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교육을 흔히 백년대계라고 하지만 가장 변화가 극심한 부분이 바로 교육정책인 것은 일종의 역설이다. 대한민국 학부모들을 전부 교육전문가로 만든 것은 교육계에 몸담고 있는 우리의 책임이다. 교육에 대한 믿음의 부족, 신뢰의 상실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필자는 일관성 있는 교육정책이 꾸준히 유지돼야 체계적인 교육이 정립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어떤 교육이 좋은 교육일까. 알면 알수록 어려운 것 또한 교육이다. 필자는 교육부를 비롯한 교육현장에서 40여 년, 특히 인천재능대학교에서 14년 등 반세기 넘게 교육의 최일선에서 깜냥껏 최선을 다해 일해 왔다. 나름 교육에 대해서는 전문가적 식견을 지녔다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도 ‘교육이 무엇이냐’는 물음에는 늘 주저한다. 명쾌한 대답을 하기에는 교육 문제가 너무 복잡하게 얽혀 있는 까닭이다.

하지만 한 가지 정리한 생각은 있다. 아니, 5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교육 한길을 걸으면서 근육처럼 저절로 생겨난 원칙이 있다. 그것은 바로 다산 정약용 선생이 제시한 실사구시(實事求是)다. 실용 우선, 합리 지향, 실상 파악, 쓸모를 강조했던 실사구시야말로 교육의 요체가 돼야 한다는 믿음이다. 현재 우리 교육이 일정 부분 정체되고 또 갈팡질팡하고 있는 이유는 현실과의 간극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학벌 중심의 사회구조에서 파생된 여러 고질적 문제에서 확인하듯이, 우리 교육은 사실을 추구하고 실용을 지향하는 힘이 너무 약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교육은 구체적 삶의 문제에서 출발해 그것을 해결해 주는 넓은 의미에서의 실용성을 갖춰야 긴 생명력을 가질 수 있다. 교육이 먹고사는 문제에서 동떨어져 독불장군처럼 고고하게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것은 더 이상 우리 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의 생활에서 추상성이 아니라 구체성으로 작동해야 한다. 한마디로 ‘써먹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쓸모 있는 인재’를 키울 수 있다. 써먹을 수 없는 교육은 생명력이 길지 않다. 죽은 교육이다. 실사구시가 우리 교육의 중심이 돼야 교육이 희망이 될 수 있다고, 필자는 단언한다.

동시에, 우리 사회에서 교육을 다시 희망이란 범주에 포함시키려면 학벌중심사회라는 유령을 퇴치해야 한다. 학력이나 학벌이 만능의 열쇠처럼 작동하는 사회여서는 곤란하다. 그런데 우리의 사회구조와 인식 체계에는 일반대학, 특히 수도권 4년제 대학 진학이 미래의 안정적 삶을 보장하는 기반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 아주 굳건하다. 그러나 그것이 행복이라는 개념과 등치되는가는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선진화된 외국처럼 직업교육을 국가가 책임지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나아가 그렇게 공부한 학생이 사회적으로 대우받는 시스템이 만들어져야 한다. 즉, 실력과 능력으로 평가받는 능력중심사회 구현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와 실천이 더욱 확산돼야 하는 것이다.

세계적 투자가 워런 버핏은 “이 세상에는 성공적인 직업과 그렇지 못한 직업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성공적인 직업인과 그렇지 못한 직업인이 있을 뿐이다”라고 했다. 학생들에게 직업의 가치가 아닌 일과 노동의 가치를 가르치고, 그 가치에 맞게 대접받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합리적인 사회다. 내일이 있는 사회이다. 그렇지 않은가.

능력중심사회를 여는 첫걸음은 고등교육 체계와 인식의 개혁이다. 전문대학과 일반대학의 위상과 역할을 명확하게 구분해 각자의 강점을 살려 주는 정책이 필요하다. 전문대학과 일반대학에 대한 서열적 인식을 타파해 각자의 전문 영역에 집중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일반대학과 전문대학이 잘하는 전문 분야는 다르다. 다른 것을 서열로 구분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학문 중심의 교육은 일반대학에 강점이 있다면, 전문직업교육과 실용교육은 전문대학의 강점이다.

이를 1등, 2등으로 점수 매길 수 있겠는가. 그리고 학생들에게도 적성과 흥미에 맞는 대학, 그 학생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분야를 일반대학과 전문대학이라는 틀을 넘어서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또 필요에 따라서 일반대학을 졸업하고 전문대학에 진학할 수도 있고, 전문대학 졸업자도 일반대학에서 실용학문의 틀을 이론적으로 강화하도록 넘나들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일반대학 진학이 곧 성공이라는 잘못된 성취기준과 고등학교 진학 지도의 편향성도 개선돼야 한다. 디지털 대전환의 시대에 학벌과 대학의 서열을 따지고 있는 것은 너무 낡은 사고가 아니겠는가. 이제는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무슨 일을 할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한 시대다. 4차 산업혁명 시대는 창의성이 더욱 중요해졌다. 산업 사회에서는 근로자를 화이트칼라와 블루칼라로 구분했으나 이제는 ‘창의적 계층’과 ‘비창의적 계층’으로 구분하는 창의적 경제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앞으로 전문대학 안에서도 자신의 끼와 꿈에 맞는 직업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는 사회적 인식이 보다 확산될 필요가 있다. 일반대학도 마찬가지다. 간판을 따러 가는 교육이 아니라 자기의 재능을 살릴 수 있는 교육이어야 한다.

또 교육이 희망이 되기 위해서 교육방식도 변화해야 한다. 공자는 인재시교(因材施敎), 즉 사람의 소질과 성품을 고려해 가르침이 달라야 한다고 했다. 즉, 맞춤형 교육을 강조한 것이다. 성격이 소극적인 제자 염유에게는 “좋은 말을 들으면 곧바로 실천하라!”라고 재촉했지만, 의욕이 넘치는 자로에게는 “부모 형제와 상의해서 행동하라!”고 신중론을 가르쳤다. 중국 춘추전국시대부터 강조된 이 교육방식이 여전히 어려운 이유는 무엇일까. 교육에 대해 열린 사고를 늘 강조하지만 정작 우리의 사고는 닫혀 있기 때문이다. 말과 행동의 극심한 불일치다. 

미국 콜로라도주립대 도시공학과 버나드 아마데이 교수는 현재의 미국 공학 교육에 대해 회의를 가진다고 밝혔다. 그는 최고의 공학 교육과정을 운영하는 학교는 미국의 명문대가 아니라 르완다의 키갈리 과학기술대학교(KIT)라고 주장했다. 이유는 이렇다. “모든 학생은 시골 마을에서 의무적으로 3개월을 지낸 후 학교로 돌아와 현장에서 경험한 문제의 해결 방안을 보고서로 제출해야 한다. 이 과정은 2004년에 시작됐는데 4년 동안 매해 반복해야 졸업 자격이 주어지고, 학위를 받으려면 그 마을에서 자신이 어떠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는지 구체적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

필자는 여기에 우리 교육의 내일을 여는 핵심적 키워드가 담겨 있다고 본다. 바로 ‘일상의 문제 해결’이다. 한 마리의 물고기를 주는 교육이 아니라 고기 잡는 법을 가르치는 교육이 돼야 한다. 대한민국 교육이 희망이 되기 위해서는 현실과 만나야 한다. 사실에 바탕을 두어 진리를 탐구하는 실사구시의 태도와 실천을 겸비해야 한다. 현실 속에 교육의 지향과 방법에 대한 답이 가려져 있다고 본다. 그 가려진 장막을 걷어 내고 본질과 만나는 순간, 교육은 다시 희망이 될 수 있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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