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형찬 수필가 겸 교육학자

백형찬 수필가 겸 교육학자
백형찬 수필가 겸 교육학자

조희룡(趙熙龍, 1789-1866)은 조선을 통틀어 매화를 가장 즐겨 그린 사람이다. 그가 매화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는 다음의 고백을 통해 알 수 있다. “나는 매화를 무척이나 좋아한다. 집에는 내가 그린 대형 매화 병풍이 펼쳐져 있다. 벼루는 매화 시가 적혀있는 매화시경연이고 먹은 매화서옥장연을 사용한다. 매화시도 백 편 지을 생각이다. 내가 사는 곳도 매화백영루라 이름 지었다. 차도 매화편차를 즐겨 마신다.” 그의 호 또한 ‘매화에 빠진 늙은이’란 뜻의 ‘매수’, ‘매화로 부처가 되려는 사람’이란 뜻의 ‘매화두타’라 했다. 매화나무에 핀 꽃들을 부처님이라 생각해서 꽃송이 하나하나를 공양하듯 그렸다. 인장도 매화경, 매화시경이라 새겼다. 이쯤되면 조희룡은 지독한 ‘매화 마니아’라 아니 할 수 없다.

조선의 선비들은 매화를 무척이나 사랑했다. 매화는 매서운 한겨울 추위를 이겨내고 꽃을 피우며 맑은 향기를 뿜어내기 때문이다. 눈보라 속에서 피어나는 모습이 마치 선비를 닮았다. 그래서 매화를 사군자(매화, 소나무, 국화, 대나무) 중에 으뜸으로 친다. 매화 그림 또한 선비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 까닭은 선비들이 임포의 삶을 동경했기 때문이다. 임포는 중국 북송 시대 시인으로 고산이라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오직 매화와 학을 기르며 살았다. 그래서 그를 매처학자라 한다. 매화를 아내 삼고, 학을 자식 삼아 산 것이다. 이런 임포의 삶을 그린 것이 바로 조희룡의 ‘매화서옥도’다.

조희룡은 여항인으로 문인화를 전문적으로 그렸다. 여항은 ‘백성의 살림집이 많이 모여있는 곳’이란 뜻이다. 조선은 사대부 문학이 주류를 이뤘는데 중인들이 따로 여항문학을 만들었다. 조희룡은 여항문인화가를 대표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사대부 집안의 후손이었지만 집안의 조상들은 낮은 벼슬살이를 했다. 그래서 그는 ‘사대부 정신을 지닌 여항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해서 조희룡의 독특한 예술세계가 만들어졌다. 일제강점기의 서예가이며 독립운동가였던 오세창은 조희룡을 ‘학이 가을 구름을 타고 훨훨 날아가듯이 길을 걸어 다닌 묵장영수’라 했다. 붓과 먹을 다루는 예술세계에서 최고봉으로 극찬한 것이다.

조희룡은 서른한 살에 헌종의 명을 받아 궁궐로 들어갔다. 왕의 명령을 기록하는 일도 했고, 국가의 사적을 보관·관리하는 장서각에서 사서 일도 했다. 비록 낮은 계급의 관리였지만 헌종의 신임은 두터웠다. 그는 금강산 그림을 그려오라는 헌종의 명에 따라 금강산을 다녀오기도 했다. 만폭동 계곡을 건너다가 그만 미끄러져 죽을 뻔했다. 그래서 오래 살려고 구룡연 너른 바위에 자신의 이름을 깊이 새겨 넣기도 했다. 헌종은 조희룡의 회갑 날에 책과 벼루를 내려줄 정도로 그를 각별하게 아꼈다.

헌종이 세상을 떠나자 조희룡은 성리학의 예법을 어떻게 푸느냐를 두고 벌인 예송논쟁에 휘말리게 됐다. 그의 스승인 김정희가 한쪽 편을 지지하자 정권을 잡은 사람들은 조희룡을 김정희 측근으로 보고 전남 신안의 임자도로 유배를 보냈다. 그의 나이 예순이 훨씬 넘은 때였다. 조희룡은 김정희와 세 살밖에 차이가 안 나고, 그에게 시서화의 기본만을 배웠을 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김정희는 조희룡을 제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억울하게 유배를 간 것이다. 당시 중인이 유배 가는 일은 흔치 않았다. 조희룡은 1년 6개월 동안 임자도에서 귀양살이했다. 그 외로운 임자도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예술세계를 구축했다. 그에게는 뜨거운 예술혼이 있었기에 절망을 희망으로 바꿀 수 있었다.

현재 조희룡의 매화작품은 30점이 조금 넘게 남아 있다. 간송미술관에 조희룡이 그린 ‘매화서옥도’가 있다. 나도 이 복잡한 세상을 벗어나 그림 속의 주인공이 되고 싶다.

※ 참고문헌

- 백형찬. 조선의 예술혼. 살림지식총서594. 살림출판사. 2021.
- 허경진. 조선의 르네상스인 중인. 랜덤하우스. 2008

<한국대학신문>

저작권자 © 한국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