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우 가천대 석좌교수

이기우 가천대 석좌교수
이기우 가천대 석좌교수

나는 공무원이 되겠다는 생각은 해 본 적도 없었다. 건강 회복 후 대학을 가려했지만 사실은 돈이 없었다. 학원비라도 벌어야 공부를 시작할 텐데 하고 고민하고 있을 때, 친구가 9급 공무원 시험을 보자고 졸랐다. 우스운 일이지만 사실 친구는 내게 도움을 받을 작정이었다. 그런데 막상 시험장에 가보니 생각했던 것과는 상황이 달랐다. 시험지가 AB형으로 나뉘어, 문제는 같아도 문항 배열이 달라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하지만 나는 시험에 합격했고, 경험이라도 해 볼 요량으로 공무원이 되었다. 

거제교육청 관리과 서무계로 발령은 받았지만 나의 마음은 콩밭에 있었다. 명문대학에 다니는 친구들이 부러웠고, 어서 입시 공부를 해 대학에 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당분간 근무해 학원비나 모을 생각으로 출근은 했지만, 일이 손에 잡힐 리 없었다. 당연히 시간이 흐르면서 상사들은 나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저 자식이 과연 공무원으로 제대로 일하겠나?”

그렇다. 그 분들의 눈에 나는 불성실하고 게으른 인물로 굳어져 갔다. 그러던 어느 날 출근을 했는데, 내 책상이 없었다. 사라진 책상은 시설계 한 귀퉁이로 옮겨져 있었다. 서무계에서 시설계로 쫓겨난 셈이다. 시설계에서 내게 맡겨진 일은, 초를 입힌 종이에 먹지를 끼고 주어진 자료를 옮겨 쓰는 일종의 필경사 일이었다. 복사기가 없던 시절에 있었던, 가장 단순하고 기계적인 일이었다. 

그제야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난 몇 개월 동안 나 자신의 생활을 돌아보니, 얼마나 형편없이 근무했는지 깨달았다. 대학을 가는 것도 인정받기 위함인데, 나는 사회 문턱에 들어서자마자 인정커녕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으니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당장 그만 두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그렇게 되면 ‘이기우는 불성실하고 나태한 인물’로 기억될 거란 생각이 들자 그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날부터 나는 화장실을 가는 시간 외에는 자리에 붙어 앉아 있었다. 그 일은 능력을 발휘할 그런 일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쉬지 않고 일했다. 처음에는 ‘저 녀석이 열심히 일하는 척 하지만 얼마나 가겠나?’하는 의심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두어 달 정도 지나자 조금씩 달라져 석 달이 지나 다시 서무계로 돌아올 수 있었다. 성실성은 인정받았지만 아직 충분하지 않았다.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능력 있게 일 잘한다는 인정을 받고 싶었다. 그 때부터 나는 나에게 주어진 업무는 물론이고, 꼭 필요한 일이라면 책임 소재를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   

진주여고에 있을 때 일이다. “사무관님, 저 여비 안 나왔어요?” 출장을 다녀온 지 한참 지났음에도 여비를 받지 못한 선생님이 물어왔다. 여비 지급을 권한처럼 여기고, 늦장을 부리곤 했던 시절이다. 나는 당장 사전 여비 지급으로 바꿔 교사들의 불편을 해소했다. 나는 아이들이 잘 배우고, 교사들이 잘 가르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고민하고, 먼저 해결해 주려고 노력했다. 선생님과 관리자 사이에 갈등이 생겼을 때도, 나는 선생님에게 넌지시 밥 먹자고 제안한 뒤 조용히 조언을 드렸고, 갈등을 지혜롭게 해결할 수 있었다. 나는 그 일이 내 일인가 아닌가보다, 어떻게 하면 그 일이 잘 될 수 있는지에 더 관심을 가졌다. 상사가 말하기 전에 먼저 일하고, 다른 사람이 싫어하는 일, 어렵고 까다로운 일이면 더 적극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했다. 

그러자 칭찬이 따라왔다. 인정은 참 좋은 것이었다. 상사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좋았지만, 능력을 인정받는 일이 무엇보다 행복했다. 드디어 일 맛을 알게 되었다고나 할까? 승진은 덤이었다. 그러다보니, 어려운 일이 생기면 모두가 나를 찾았다. 그래서 ‘이기우가 하지 못하는 일은 없다’거나 ‘이기우가 못하는 일은 원래 안 되는 일’이라는 말들을 할 정도였다. 그 때, 나의 삼실(三實) 철학을 확고하게 세웠다. ‘진실하고, 성실하고, 절실하게 일하자.’

 “이 사무관, 고등학교 밖에 안 나왔어요?” 교육부 서무계장으로 일 할 때, 정희채 차관님이 물었다. 내 인사기록카드를 보고 놀라신 듯 했다. ‘고졸 신화’의 시작이었다. 지방의 말단 공무원이었던 내가 계속 승진해 교육부 차관까지 오른 것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놀라워한다. 어떤 이는 특별한 배경이나, 다른 지원이 있지 않나 의심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진실, 성실, 절실’의 자세로 열과 성을 다해 일한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경남교육청에서 6급으로 일할 때, 주말이면 서울로 올라와 사무관 시험공부를 했다. 주경야독의 고단한 삶이었지만 결국 총무처 주관 승진 시험을 통과해 사무관이 되었다. 고등학교 두 곳, 진주여고와 창원기계공고를 거쳐 경남교육청 계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던 어느 날, 교육부 총무과 서무계장으로 일할 기회가 왔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교육부 총무과 서무계장은 기피 직책이었다. 그 일은 장관, 차관님들의 식사는 물론이고 골프 수행이며 장관 집 전화기 수리까지 아침부터 밤까지 뛰어다니며 수발을 드는 일이었다. 다른 직책들은 권한도 있고, 능력을 발휘할 기회가 많은 자리인데 비해, 온갖 궂은 일만 하는 서무계장을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교육부 내에서 일하려고 나서는 사람이 없자 지방교육청에서 사람을 찾았는데, 일 잘한다는 소문이 난 내가 추천을 받은 것이다.

교육부에 와서도 정말 열심히 일했다. 시간은 금세 흘렀다. 보통 힘든 직책을 일 년이나 일 년 반 쯤 하고 나면 다른 자리로 옮겨주는 게 관례인데, 총무과장님은 나를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나는 말없이 일했고, 그 노력을 인정받아 결국 보통교육국 주무과인 교육행정과로 갈 수 있었다. 교육행정과 주무 사무관은 국장을 보좌하는 자리라서 능력을 발휘할 있는 기회가 많았다. 거기서도 좋은 평가를 받아, 다시 서기관으로 승진해 부산 한국해양대학교 서무과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나는 어떤 자리, 어떤 직책이 주어지든 내가 세운 ‘진실, 성실, 절실’의 삼실(三實)철학을 잊지 않았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이 시대 젊은 청춘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싶어서다. 나는 50년 넘는 일 속에서 한번도 ‘교육’이라는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다. 교육자로서 청년들에 대한 책임과 희망을 놓아본 일이 없다는 말이다. 현실이 어렵다고, 아무도 지원해 주지 않는다고, 사회가 우리의 미래를 보장해 주지 않는다고 절망하는 젊은이들에게 나는 말하고 싶다. 겨우 고등학교만 나온 내가, 교육부 차관이 되고 14년 동안 대학 총장을 지낼 수 있었던 것은, 거창한 꿈이나 목표를 세워서가 아니다. 꿈과 도전은 멀리 있지 않다. 굳이 인생 설계라는 큰 무게로 자신을 짓누를 필요가 없다. ‘위대한 일을 할 수 없다면, 작은 일을 위대한 방식으로 하라’는 벤자민 프랭클린의 말을 생각해 보라. 수많은 삶의 경로들이 있겠지만, 그 순간순간 열정을 다해 일함으로도 충분히 인정받고 행복할 수 있는 삶이 ‘여기 있다’는 것을 전해 주고 싶을 뿐이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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