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규택 계명문화대 교수

조규택 계명문화대 교수
조규택 계명문화대 교수

밴 플리트(James Alward Van Fleet, 1892-1992) 장군은 6‧25전쟁 중 2년이나 유엔지상군 사령관 겸 미8군 사령관이었다. 이 기간 그는 북한과 중공군의 공세를 차단하면서 한국군의 발전과 현대화에 박차를 가했다. 특히 국군 장교 2000명을 미국의 포트 베닝(Fort Benning) 보병학교를 비롯해 각 병과학교에 보내 교육받게 했다. 우리의 육군사관학교도 미 육사와 같은 4년제로 발전시켰다. 전쟁이 급했지만, 교육의 중요성을 고려해 1951년 진해에서 4년제 정규사관학교로 재창설했다. 고급장교들의 지휘와 참모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육군대학도 설치했다. 또한 제주도 모슬포에 제1 훈련소를 설치해 체계적으로 신병을 훈련하게 했으나, 수송과 교통의 불편으로 논산에 제2 훈련소를 추가로 창설했다. 이런 연유로 이승만 대통령은 밴 플리트 장군을 한국 육군의 아버지라 불렀다.

밴 플리트는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인 아이젠하워와 브래들리 원수와 함께 1915년 미 육군사관학교(West Point)를 졸업한 동기생이다. 그는 1차 세계대전에 대대장으로 참전했고 2차 세계대전 때는 보병연대장으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에도 참전했다. 1944년 기준으로 대령이었던 그는 동기생들에 비해 진급이 늦었지만, 8월에 준장이 됐고 넉 달 만에 소장으로 진급해 사단장과 군단장까지 진출한다. 미 1군 예하의 3군단장으로 작전했으며, 종전 직전 패튼 장군의 3군에 배속된다. 전후 그리스의 군사고문단장으로서 부임해 그리스의 공산 게릴라를 소탕하기도 했다.

6‧25전쟁이 예상과 달리 장기화되자 밴 플리트는 병력의 희생을 줄이고 적의 공격을 차단하기 위해 고지전의 특성을 고려한 포병 전술을 활용했다. 포탄을 대량으로 쏟아부어 중공군의 인해전술을 무력화하며 휴전회담에서 유엔군의 입지를 높이는 전술을 발휘했다. 무엇보다 그는 맥아더 장군과 달리 정치적 야심을 보이지 않았다. 철저히 비정치적으로 전쟁을 수행했으며 오로지 병력의 안전과 전쟁의 승리만을 목적으로 싸웠다. 나아가 한국군의 교육과 자립에 큰 관심을 보였으며, 미 수뇌부를 설득해 한국군의 전투 훈련과 무장 능력을 갖추게 했다. 그는 육군사관학교 동기였던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주한 미국대사를 추천했지만 이를 사양하고 오로지 민간 외교관으로서 한국을 진심으로 응원하고 도왔다.

그는 평생 술과 담배를 하지 않았으며 건강을 잘 유지해 100세를 넘기며 장수했지만 그의 이런 장수에도 불구하고 아픈 역사가 있었다. 자신의 유일한 아들이었던 제임스 밴 플리트 2세(James Van Fleet Jr, 1925-1952) 대위가 한국전쟁에서 실종‧전사했기 때문이다. 아들 밴 플리트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미 육사를 졸업하고 공군에 지원해 B-26 폭격기 조종사로 참전한다. 한국에서 아버지의 60회 생일을 축하했지만, 참전 후 4번째 폭격 임무 중 평안북도 선천 상공에서 대공포에 피폭됐다. 이후 대대적인 수색 작전을 펼쳤지만 끝내 찾지 못했고 밴 플리트 사령관은 모든 수색을 중지시켰다.

밴 플리트는 1951년 7월 31일에 4성 장군이 됐고 1953년 휴전을 앞두고 본국으로 귀환해 3월 말에 전역한다. 그는 전역 후에도 대한민국과 깊은 인연을 맺고 미국에서 코리아 소사이어티(The Korea Society)를 설립하고 한미 관계 발전에 헌신한다. 호국보훈의 달인 6월과 한미 동맹 70주년을 맞아 그의 한국 사랑을 되새기며 밴 플리트 부자가 보였던 노블레스 오블리제와 헌신을 되새긴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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