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석 한국뉴욕주립대학교 팀장

​김규석 한국뉴욕주립대학교 팀장 ​
​김규석 한국뉴욕주립대학교 팀장 ​

때는 2012년, 가족과 호주를 여행하던 필자는 캥거루를 찾아 길을 나섰다. 인터넷을 검색하다보니 시드니에서 동북부로 2시간 정도 떨어진 어떤 마을에 가면, 넓고 푸른 잔디밭에서 들판에서 자유롭게 뛰노는 수많은 캥거루를 만나볼 수 있다는 글을 N블로그에서 꽤 많이 찾을 수 있었다.

기차를 타고 도착한 인적이 드문 작은 마을, 이곳에서부터 20분 정도 택시를 타고 더 들어가야 원하는 장소에 도착할 수 있다고 했다. 때마침 지나가던 한 아주머니는 택시를 기다리던 필자의 일행을 보고 의아하다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리고 이렇게 한마디를 남긴 뒤 가던 길을 갔다.

“조용했던 우리 동네에 어느 날부터인가 한국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기 시작했어요.”

잔디밭에서 뛰노는 캥거루를 만난 우리 가족은 무지(無知)와 호기심이 해소되었다는 상쾌한 기분을 만끽했다. 기차역에서 만난 아주머니의 말처럼 여기저기 한국인 관광객이 유독 눈에 띄었다. 그리고 캥거루 주변으로는 새하얀 유니폼을 위아래로 갖춰 입은 사람들이 서성거렸고, 간호사가 휠체어를 끌고 필자 옆을 스치듯 지나갔다.

알지 못하는 것에 관한 동경은 누구든 어느 정도 가지고 있는 심리일 것이다. ‘모른다’는 것은 두려움의 이유가 되기도 하지만, 가벼운 호기심의 원천이자 알고 싶다는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에너지다. 필자도 ‘캥거루를 눈앞에서 만나는 느낌’이 무엇인지 몰랐기에 인터넷 정보에 의존해 호주의 한적한 시골 마을로 모험을 떠난 것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모험의 끝에서 다행히 캥거루를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꼭 캥거루를 보기 위해 호주 시골 마을의 정신병원에 가야만 했었는가는 자괴감은 피하기 어려웠다.

우리는 전 세계 수많은 나라에 존재하는 대학을 얼마나 넓고 깊게 알고 있을까. ‘고등교육(higher education)’이라는 거대한 세계가 품은 정보와 지식은 사실상 무한하며 끊임없이 진화한다. 누군가 아무리 많이 알고 있다고 주장하더라도 결국 ‘모르는 것’일지 모른다. 분자가 아무리 크더라도 분모가 무한대라면 수학적으로 ‘0’에 수렴하기 때문이다. 불가지론(不可知論)을 주장하려는 함은 아니다. 집합적 인간 사회는 끊임없이 ‘앎’을 추구하는 존재이며 그렇게 진보해왔다.

대학 사회도 마찬가지다. 무지를 극복하고 조금이라도 더 알기 위해 전 세계 대학의 혁신과 발전전략에 관한 정보를 탐색, 학습하고 전파, 적용한다. 그러나 그 양상을 자세히 관찰해보면 다분히 편협거나 주체적이지 못하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편협함’은 대체로 미국 일변도의 관점으로 볼 수 있다. 글로벌 고등교육 생태계에서 미국과 미국 고등교육 시스템의 패권(hegemony)은 현실이다. 지식기반 사회를 넘어 기술의 혁신이 이끄는 디지털 전환의 시대에서 대학을 논하는 과정에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력을 보유하고 교육 혁신을 주도하는 미국대학을 논하지 않는 것이 되레 자연스럽지 않다.

그러나 대학 관계자라면 미국대학 시스템에 대한 종속성이 어제오늘 일이 아님을 한 번쯤 비판적으로 생각해보는 것이 좋다. 한국전쟁 이후 미군정이 우리나라 고등교육 개혁을 주도하고, 우리나라 대학의 경쟁력이 충분하지 못할 때 미국에서 선진 학문과 시스템을 배우고 돌아온 지식인이 사회지도층으로 자리를 잡았으며, 대학에서도 미국 유학파가 상당한 학문과 행정 권력의 차지하면서 형성된 역사의 산물이다.

어디 미국뿐이겠는가. ‘비주체성’은 무비판적 수용성을 의미한다. 대한민국에 맞는 주체적 사고와 맥락을 고려한 관점보다는 ‘해외에서 효과가 있거나 혁신적이라고 여겨진다면 그것이 옳은 것’이라는 논리가 힘을 얻는다. 새로운 문물의 장단점을 분별하고 시사점을 찾으며, 배경 요인과 깊은 철학을 이해하며 나아가 우리나라의 특성과 각 대학의 반영하는 상호작용과 정반합의 논리를 통해서 적절한 수준의 진보적 지점을 찾는 과정이 생략되는 것이다. 위와 같은 흐름은 ‘내가 유학할 땐 이런 게 있었는데 말이야’와 같이 경험주의에 근거한 ‘무논리의 논리’가 등장하는 바탕이 되며, 나아가 대학 혁신을 둘러싼 담론에서 “외국에서는 이렇다던데”라는 주장이 강력한 영향력을 갖게 한다.

경희대 사회학과 김종영 교수는 「지배받는 지배자」라는 저서를 통해 ‘트랜스내셔널 미들맨(transnational middleman)’이라는 용어로 이러한 행위자의 존재와 현상을 조명하기도 했다.

대학 국제화와 혁신을 핑계로 맥락적 유사성과 현장 적용 가능성 등에 관한 충분한 성찰과 검토 과정 없이, 외국과 한국 사이에 존재하는 고등교육의 장(field)의 어딘가에서 활동하는 지식 중개인이 말했다는 이유로 그 대학의 △제도 △사례 △용어 등을 수입해 일선 대학 행정의 현장에 큰 혼란을 만들어낸 사례를 찾아보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2013년 어느 날, 해외 출장을 마치고 돌아온 고위 리더십 중 한 명이 “제가 가보니 모 대학에서는 모든 행정직원이 가장 앞줄에 앉아있더군요”라고 하며 사무실 구조를 온통 뒤집어 버리는 바람에 정작 그곳에서 하루 종일 근무하는 당사자들은 영문도 모른 채 캐비닛과 책상을 며칠 동안 옮겨야 했던 필자의 경험은 캥거루를 찾아 호주 외딴 마을의 정신병원을 방문했던 에피소드와 맞물려 매우 흥미로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런데 정신병원 주변을 뛰놀던 동물은 과연 캥거루였을까? 돌아 나오는 필자의 등 뒤에서 어떤 한국인 관광객이 이렇게 외쳤다. “근데 이거 왈라비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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