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수 한양대 ERICA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박기수 한양대 ERICA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박기수 한양대 ERICA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고약한 버릇이 생겼다. 연구 분야가 콘텐츠 스토리텔링이다 보니 새로 출시되는 콘텐츠를 놓치지 않고 찾아보게 된다. 관련 분야의 텍스트를 많이 보는 게 뭐 나쁠까마는, 아무래도 보아야할 양이 많다 보니 정상 속도로 보는 콘텐츠가 거의 없다. 1.25배속에서 1.5배속을 오간다. 박사과정생들도 대부분 그렇게 본단다. 하기는 현업과 학업을 병행하는 이가 많은 박사과정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그들이라고 시간이 넉넉하겠는가. 어찌되었든 소위 ‘빨리 감기’로 보는 이들이 부쩍 늘어난 모양이다. 이나다 도요시(稻田 豊史)의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이 화제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러한 현상을 이나다 도요시는 ‘감상에서 소비’로의 변화로 읽으며, 그 원인을 4가지 요인으로 꼽았다. 첫째, 구독서비스의 영향으로 볼 수 있는 콘텐츠 공급량이 증가했다. 둘째, 작품의 과잉 설명이 보편화됐음을 외적 요인으로 들 수 있다. 셋째, 타인과의 소통을 위한 공감이 강제되는 상황에서 시간의 가성비를 고려하게 됐다. 넷째,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자신의 방식대로 즐기겠다는 쾌락주의를 내적 요인으로 꼽고 있다.

다시 말해, 빨리 감기는 구독서비스 기반 OTT의 전면화 절대 작품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보고 싶은 작품보다 보아야만 할 작품이 강제되는 상황에서 시간의 가성비를 고려한 전략적 선택이라는 관점이다. 이는 빨리 감기로 향유하는 최근 현상의 종합적 맥락을 정확히 짚어내며, 빨리 감기로 인해 변화된 향유 방식에 대해 우려와 희망을 동시에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사실 최근 미디어 환경의 변화로 인해 새롭게 등장한 향유 방식이 어디 빨리 감기뿐이랴. 영화나 드라마를 짧은 시간 안에 내용을 파악할 수 있도록 축약해서 편집한 ‘패스트 무비’(fast movie)의 전면화는 단지 저작권 침해의 문제를 넘어 향유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결정짓는 가늠자 역할을 한다든가, 줄거리 중심의 축약과 편집이 이뤄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로 마치 독립된 작품인 양 향유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됐다. 더구나 패스트 무비는 영화나 드라마의 풍부한 구현 요소를 모두 소거하고 스토리 중심으로만 축약을 시도함으로써 정보 중심의 소비로 향유를 제한한다. 

향유자가 보고 싶은 만큼 보고 즐기는 빈지워칭(binge watching)도 반드시 주목할 만한 변화다. 빈지워칭은 한꺼번에 공개된 작품 전체를 모두 본다는 의미의 ‘몰아보기’로만 보는 것은 현재 개방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빈지워칭의 다양한 양상을 놓치기 쉽다. 구독서비스 기반의 OTT 플랫폼의 주요 관심사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어떻게 구독자를 모아 구독하게 할 것인가. 또 하나는 확보된 구독자를 떠나지 못하게 묶어둘 것인가(lock-in)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최근에는 <더 글로리>의 예에서 보듯 콘텐츠 전체를 한꺼번에 공개하는 것이 아니라 파트별로 나눠 공개해 구독자를 묶는 전략을 쓰기도 한다.

따라서 빈지워칭은 몰아보기로 단순화하기보다 향유자가 보고 싶은 만큼 자기 취향대로 보는 방식이라 보아야 할 것이다. 빈지워칭이 보편화되면서 잠시라도 지루하거나 서사의 이완이 느껴지면 향유자는 미련 없이 떠나는 까닭에 서사의 완급조절이 불가능해졌고, 강한 자극의 연속이나 장르별 클리셰를 활용한 익숙한 향유를 보장해야 하는 상황을 맞았다. 

분명한 것은 빨리 감기, 패스트 무비, 빈지워칭이 이미 보편화됐다는 점이다. 이러한 향유 방식이 자본주의 논리가 기형적으로 빚어낸 결과이며 콘텐츠의 원형질을 훼손하는 저열한 시도라는 비난은 섣부르다. 이것은 역으로 기술의 진보와 함께 다수의 향유자가 원했고, 그것에 적극 부응한 결과인 까닭이다. 섣부른 비난보다는 무엇이, 왜, 어떻게 변화했는지 개방적 자세로 탐구해볼 일이다. 콘텐츠 향유는 당위적 요구가 아니라 ‘지금 이곳’에서 얼마나 자유롭게 지속 가능한 형태로 즐길 수 있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점점 향유자에게도 주도권이 넘어가고 있고, 향유자가 확보한 자유만큼 우리는 새로운 지경의 향유를 만날 수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우리의 몫은 새로운 지경에 대한 날선 비난이 아니라 심도 있는 탐구가 아니겠는가.

<한국대학신문>

저작권자 © 한국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