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홍 서울미디어대학원대 석좌교수(전 서울디지털대 총장, 17대 국회의원)

김재홍 서울미디어대학원대 석좌교수(전 서울디지털대 총장, 17대 국회의원)
김재홍 서울미디어대학원대 석좌교수(전 서울디지털대 총장, 17대 국회의원)

7월말 가족 휴가로 남해안과 중부 내륙의 지방 소도시들을 돌아보았다. 전남의 신안, 목포, 여수, 전북의 남원, 경남의 남해, 충남의 공주를 자동차로 순회하며 하루씩 묵는 여정이었다. 제주나 강원도로 가자는 가족들에게 좀 특색있는 역사 유적과 문화를 중심으로 테마기행을 하자며 휴가 계획을 짰다. 신안의 보라색 퍼플교에서 1004개 섬의 안내판(천사도)을 보았고 남원 우주항공천문대에서 망원경으로 블루 문을 관측했다. 도시마다 나름 관광자원이나 시민 건강을 위한 시설들이 잘 구비돼 있는 것은 지방자치가 뿌리내린 덕일 것이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지방 도시들을 여행한 소감은 실망이었다. 크게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지방 도시들이 내 상상을 벗어나 있었다. 시내 자동차 길이 기본적으로 좁은데도 곳곳에 불법 주정차 차량들이 차도를 침범한 채 방치돼 있어서 제대로 운전하기가 어려웠다. 불법 주정차를 단속하지 않는 것은 지방자치의 부산물이기도 한 정실주의나 지역 유착의 한 모습일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또 이름 있는 전통문화의 관광도시도 날 저문 저녁 가로등이 꺼져 있어 어두웠고, 차량 통행이 일찍 끊겨 침체 분위기였다. 관광도시 호텔조차 야외 주차장에 보안등이 없어서 베테랑 운전자도 옆 차를 건드리지 않고 주차하기 힘들었다. 대도시에서 경험해 온 운전 습관으로는 교통법규를 지키기가 무리였다.

대도시 출신 여행객으로서 일상적인 불만 토로를 넘어 한마디로 ‘지방 소멸’과 함께 국가균형발전의 허구성을 실감하는 현장 경험이었다. 지방 소멸은 국가균형발전의 주적일 수밖에 없다. 지방 소멸은 인구 유출과 재정 기반 취약, 일자리 부족과 주거 등 정주여건 부족 등이 만성적 요인으로 관련 통계들도 많지만 실제 현지를 돌아본 결과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었다. 나는 그후 전북의 새만금에서 개최된 세계 잼버리대회가 많은 허점을 노정한 채 폐막하는 것을 보면서 상당 부분 지방 소멸의 한 단면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국가균형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공기관들을 지방에 분산 배치한지도 꽤 오래 됐지만 그 효과에 대해 제대로 평가하고 개선해 왔는지는 미지수다. 정책이 입체적이고 시너지 효과를 내도록 설계되지 못하고 각 지역에 떡 하나씩 주고 끝내는 단편적 시행이었다는 비판도 많았다. 요즘 ESG 용어로 말하면 지속가능한 발전에 턱없이 못 미친다는 평가다.

지방 소멸 위기를 막고 지속가능한 국가균형발전으로 전환시키는 방안은 ESG 정신과 그 가이드라인 속에서 찾는 것이 바람직하다. 각 지역마다 경제·산업, 교육, 인간개발, 문화·예술, IT 기술을 움직이는 주체는 손으로 꼽을 만큼 뻔하다. 뭐니 뭐니 해도 지방자치단체와 기업과 대학을 빼고는 논의할 수 없다. 지역 발전에 기관차 역할을 해야 할 이 같은 핵심 단위들이 상호 연결되고 연대하지 않고서는 입체적이고 지속가능한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 우리는 디지털 강국으로서 이미 4차산업혁명을 통해 초연결 사회(super-connected)의 강점을 체득했다. 

지역 공동체의 핵심 구성단위들이 상호 연결되고 연대하는 지방 활성화와 국가균형발전 방안은 지방자치단체와 산업체, 그리고 대학이 ‘지산학(地産學) ESG 연대’를 구축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대학에 산학협력단이 설치된지는 오래됐지만 그것이 ESG 정신으로 지자체 및 산업체와 긴밀하게 연대한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최근까지 ESG 발전을 이끌어 온 주요 문서로 서너 개가 꼽힌다. 첫째는 1987년 유엔환경계획(UNEP)과 세계환경개발위원회(WCED가 ‘우리 공동의 미래 (Our Common Future)’라는 이름으로 공동 발표한 보고서다. 일명 ‘브룬트란트 보고서’로 알려진 이 문서는 “미래세대가 욕구를 충족할 수 있는 기반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현재 세대의 니즈를 충족시키는 것이 지속가능한 발전”이라고 개념 정의했다. 브룬트란트 보고서 이후 세계 ESG의 발전에 핵심적 지침이 된 두 번째 문서는 국제표준화기구가 2010년 11월 발표한 ISO 26000이다. 그리고 세 번째 주요 문서로 EU가 올해 3월부터 적용하고 있는 기업지속가능성 보고지침을 들 수 있다. 모두가 기업을 위시한 주요 경제주체와 조직 단위들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한다.

이 중 ‘지산학(地産學) ESG 연대’가 바탕해야 할 근거 문서는 바로 ‘ISO 26000’으로 그 가운데 제7항의 “지역공동체 참여 및 개발” 지침이 핵심이다. 지자체와 기업과 대학이 함께 이행할 지침 속에 지역공동체 참여가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ISO 26000은 지역공동체 외에 지배구조, 인권, 노사관행, 환경, 공정거래, 소비자 이슈 등 모두 7대 의제를 규정했다.

지산학 연대 중에서 심장 역할을 해야 할 대학은 지역사회와 소통하며 공헌하는 것이 본래의 사명이기도 하다. 미국에서도 하버드와 MIT는 케임브리지와 보스톤을, 캘리포니아주립대 버클리캠퍼스는 버클리를, 예일대는 뉴헤이븐 등 각기 자교가 입지한 지역을 공동체 정신으로 섬긴다. 지역의 변호사나 기업인 등 유지들을 대학평의회 등에 초빙해 산학협력과 교육에 자문을 받기도 한다. 이에 비해 한국은 아직 대학의 지역사회 봉사가 원활해 보이지 않는 실정이다. 수도권의 규모가 큰 대학들은 지역이 아니라 중앙정부나 대기업을 상대하고 지방대학들은 지자체나 지역사회에 연결돼 있지 않으며 기여할 만한 여력이 없는 실정이다. 대학들이 ISO 26000의 ‘지역공동체 참여 및 개발’ 지침을 구현하기 위한 실행기구를 만들어 적극 나서야 한다. 

지방소멸을 막을 지역의 정주 여건이란 주거, 교육, 일자리, 문화 향유 등으로 구성된다. 이 중 대학이 주도하는 교육은 청년 교육뿐만 아니라 평생교육 프로그램을 심도 있게 개발해야 한다. 고령화 시대에 지역 주민이 설계하는 2모작 또는 3모작, 이른바 ‘앙코르 커리어’를 위해 개인 맞춤형 평생교육 커리큘럼을 제공하는 자기개발 동반자가 바로 대학이다. 그리고 교육의 성과를 일자리 창출로 연결시키는 사명은 기업에 있다.

이와 같이 대학과 기업이 지역사회에 기여하면 공공 리더십의 주체로서 지자체는 이를 행정 지원하고 지속가능한 발전을 추동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행정당국과 별도로 교육감을 중심으로 한 교육청 또한 지역의 미래세대와 앙코르 커리어 교육을 특화함으로써 ESG 발전에 부응할 수 있다. 지자체의 공공 리더십이란 지역의 수장을 선거로 뽑는다는 대표성과 정통성에 바탕을 둬 유·무형의 가치 배분권을 행사한다. 지역공동체에 기여하는 기업을 위해 해외 투자 유치에 나서고 경영 환경의 개선 등의 혜택을 줄 수 있다. 지자체와 기업과 대학이 각각의 사명과 기능을 ‘지산학 ESG연대’로 고도화하면 지방이 살아 움직이고 지속가능한 국가균형발전을 이뤄 나갈 수 있을 것이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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