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태 세명대학교 디지털콘텐츠창작학과 교수

김기태 세명대 디지털콘텐츠창작학과 교수
김기태 세명대 디지털콘텐츠창작학과 교수

저작권 보호에 관한 최초의 국제협약으로 1886년 출범한 베른협약은 1896년 파리회의에서 처음으로 개정되는데, 동양에서는 최초로 일본이 1899년 7월 15일 베른협약 파리개정 규정 발효와 함께 가입한다. 그리고 그해 저작권법을 제정해 이후 1970년 말까지 시행한 바 있다. 이를 일본에서는 ‘구 저작권법’이라고 하는데, 당시로서는 선진외국 저작권법에 뒤지지 않는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이유인즉, 베른협약을 기초로 했기 때문.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을 단행했던 일본은 당시에 이미 판권조례, 각본악곡조례, 사진판권조례 등을 제정하고 있었지만 그 보호대상은 문서, 도화(圖畫), 사진 등의 제한적 범위에 그쳤고, 외국인 저작물 보호는 인정하지 않았다. 이처럼 미숙한 저작권 법제도 아래서 저작권 사상의 성취는커녕 저작권이란 단어를 아는 사람도 극소수였던 토대에서 어떻게 베른협약에 기초한 진보적인 저작권법을 제정할 수 있었을까.

그 배경에는 이른바 안세이(安政) 불평등조약이 있다. 1853년, 미국 페리(Matthew C. Perry) 제독은 4척의 배를 이끌고 일본 우라가(浦賀)에 입항하면서 도쿠가와 막부(幕府)에 대해 개항을 요구한다. 갑작스런 개항 요구에 대해 당시 일본을 통치하던 막부는 1858년 미국, 네덜란드, 러시아, 영국, 프랑스와 이른바 ‘안세이 불평등조약’을 맺고 요코하마, 나가사키, 하코다테, 미토 등지에 외국인 거류지를 설치하게 된다. 이에 영지재판(領事裁判) 외에 행정 및 경찰권을 외국인이 장악하고 영구차지권을 취득하는 사례가 생김으로써 필연적으로 식민지적 성격을 가지는 지역이 일본 각지에 발생하게 되었다. 이처럼 불평등조약으로 인한 문제점을 해결하는 일은 결국 메이지 정부의 최대 과제로 남기에 이르렀다.

메이지 정부는 불평등조약을 바로잡기 위한 전제로 근대적 법치국가의 형태를 다지기 위해 1889년 대일본제국헌법을 시작으로 1898년 민법, 이어서 상법의 제정을 통해 근대법전 정비를 서둘렀고, 그 일환으로 저작권법도 1899년에 제정하게 된다. 불평등조약을 시정하기 위한 첫걸음으로 1894년 런던에서 영일통상항해조약이 조인되었는데, 그 내용 중에 “일본정부는 일본 국내에 대한 영국영사재판권 폐지에 앞서 공업소유권 및 저작권의 보호에 관한 만국동맹조약(베른협약)에 가입할 것을 약속한다”는 규정이 들어 있었기 때문에 이를 이행하기 위해 베른협약에 가입할 수밖에 없었고, 이를 계기로 미국, 러시아, 독일 순으로 통상조약을 체결해 나갔다. 결국 일본에 있어 저작권법 제정, 베른협약 가입 등 근대적 저작권 법제의 구축은 일본정부 또는 일본인 스스로의 노력으로 저작권 사상이 무르익어 이뤄진 결과라기보다는 외세의 개입에 이끌려가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결과라는 성격이 강했다.

한편, 일본 역사에 있어 막부 말기부터 메이지 시대에 걸쳐 일본인들에게 저작권 보호의 당위성을 맨 처음 주장한 사람은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1901)로 알려져 있다. 그는 막부 말기에 미국으로 건너가 그 문물과 법제도를 접한 뒤에 인간의 노동은 존중받아야만 한다는 이념을 바탕으로 그 저작 및 실천 활동을 통해 무체재산이 존중받아야 하는 이유를 설파했다는 점에서 일본 저작권 역사상 반드시 주목해야 하는 인물이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초기작 『서양사정외편(西洋事情外編)』(1868) 제3권에서 「사유(私有) 책을 논한다」라는 제목으로 “사유에는 두 종류가 있어, 하나를 이전(移轉)이라 하고, 하나를 유전(遺傳)이라고 한다”고 서술하고 있다. 여기서 이전이란 동산(動産)을, 유전이란 부동산을 뜻하지만 이 문장에 이어서 “사유의 종류에는 또한 한층 아름다움을 다하여 번영하는 비밀스러운 것이 있는데, 즉 발명면허, 장판(藏版)면허 등이 그것이다. …… 책을 저술하고 그림이나 도안을 제작하는 사람도 그것을 그 사람의 장서로 만들고, 개인의 이익을 얻기 위한 면허를 받아 사유재산으로 만든다. 그것을 장판면허(카피라이트)라고 부른다”고 하면서, 여기서 ‘장판면허’란 “저술가가 홀로 그 책을 판목(版木)으로 제작하여 전매 이익을 얻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런데 후쿠자와 유키치는 1873년(메이지 6년) 7월 15일자로 작성한 문헌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카피라이트’는 이전에 장판면허(藏版免許)라 번역했지만 이 단어는 적절하지 않다. ‘카피(copy)’는 옮기는 것을 뜻하고 ‘라이트(right)’는 권리를 뜻한다. 즉 저술자가 책을 저술한 뒤 이를 옮겨 판본으로 만들고 당사자가 자유롭게 취급하여 다른 사람이 이를 복제할 수 없게 하는 권리이다. 이 권리를 얻은 자를 ‘카피라이트’를 얻은 자라 칭한다. 그러므로 ‘카피라이트’라는 단어는 출판특권, 혹은 이를 줄여서 판권(版權)이라고 번역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후쿠자와 유키치는 카피라이트(copyright)라는 말을 ‘출판권(出版權)’ 혹은 줄여서 ‘판권’이라 번역하는 것이 낫다고 여기고 판권이라는 단어를 제창하게 된다. 그 결과 1875년 출판조례에는 법조문상 저작자, 번역자의 권리를 ‘판권’이라고 한다는 점이 분명하게 규정돼 있으며, 그 후 일본에서 더 이상 판권이라는 말이 법률용어로 사용되지 않게 된 이후에도 일반에 널리 퍼져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쉽게 들을 수 있을 만큼 흔한 단어가 되고 말았다.

또 ‘저작권(著作權)’이란 용어의 유래 또한 여러 가지 정황을 토대로 살펴볼 때 어느 특정인이 창안한 것이라기보다는 관계자들의 회의 과정에서 누군가에 의해 제안된 것이 자연스럽게 쓰인 결과일 것으로 추정된다. 나아가 일본에서 1887년에 제정된 판권조례, 1893년에 제정된 판권법 등의 용례와 맞물려 혼용됐을 가능성이 높으며, 1903년 10월에 조인된 일본과 청나라 사이의 ‘추가통상항해조약’에서 일본어의 ‘판권’이 중국어로는 ‘인서지권(印書之權)’으로 번역됨으로써 이때는 ‘저작권’이라기보다는 ‘출판권’을 뜻했던 것으로 보인다.

결론적으로, 1899년 정식으로 ‘저작권법’이 생기면서 “일본에서 더 이상 ‘판권’이라는 말이 법률용어로 사용되지 않게 된 이후에도 일반에 널리 퍼져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쉽게 들을 수 있을 만큼 흔한 단어가 되고 말았다”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일제강점기 즈음에 우리나라에 유입된 ‘판권’이란 용어는 ‘저작권’을 뜻하는 말로 널리 쓰여 심지어는 음반 발행이나 영화 제작에 있어서도 ‘저작권’이라는 용어보다 더 널리 쓰이는 형국으로 발전하게 됐다.

오늘날에도 ‘출판권’이라고 해야 할 것을 ‘저작권’이라고 하거나, ‘저작권’이라고 해야 할 것을 ‘출판권’ 또는 ‘판권’이라고 하는 사례가 많이 있다. 예를 들어, 번역 도서에 등장하는 ‘한국어판 저작권’이란 용어는 ‘한국어 출판권’이라고 해야 옳으며, ‘영화 판권’ 또는 ‘사진 판권’이란 말은 ‘영화 저작권’ 또는 ‘사진 저작권’으로 정확하게 표현해야 한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여전히 저작권을 공식적으로 ‘판권’이라고 한다는 점에서 한번 각인된 식민지 사상이 얼마나 무서운지 새삼 깨닫게 된다. 이제부터라도 ‘판권’이라고 하지 말고 ‘저작권’이라고 하자.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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