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규택 계명문화대 교수

조규택 계명문화대 교수
조규택 계명문화대 교수

6‧25전쟁에서 낙동강 방어선이 위협당하는 절체절명의 순간, 세계 전사에 빛날 역사적 작전인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된다. 성공 확률 5천분의 1이었던 인천상륙작전은 7만 5천여 명의 병력과 261척의 유엔군 함정이 투입된다. 우리 국군도 미군과 함께 인천상륙작전에서 위용을 떨쳤다. 약 8천 명의 카투사가 미 7사단 소속으로 참가했지만, 순수 국군으로 작전에 참전한 부대는 제1해병연대와 육군 제17연대였다. 팔미도 등대가 점등되자 함포 사격과 더불어 상륙작전이 시작된다. 상륙부대는 크게 월미도 위쪽 북성포구의 적색 해안, 월미도 앞의 녹색 해안, 그리고 월미도 아래쪽 청색 해안으로 3구분 되었다. 이 중에 북성포구의 적색 해안은 방파제가 높아 사다리를 타고 진격해야만 했다.

유엔군과 함께 9‧28 서울 수복 후 해병대 박정모 소위와 해병대원들은 정부 중앙청사에 태극기를 게양한다. 우리 해병대가 수도 탈환 작전에 참전해 서울의 중앙청사에 태극기를 게양했다는 것은 실의에 빠진 국민에게 큰 용기와 힘을 주었다. 맥아더 장군이 총지휘관이었지만 한국군의 지휘관은 해군참모총장이던 손원일 제독이었다. 그는 전투복에 소총을 잡고 해병대와 함께 상륙, 서울에 입성한 한국군 최선임자로서 “대한민국 국군은 서울을 수복했다”라는 포고문을 그의 명의로 발표한다.

인천상륙작전의 진정한 의의는 유엔군이 우회 기동을 통해 북한군의 병참선을 일거에 차단했으며, 낙동강 방어선에서 반격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인천의 항만시설과 서울에 이르는 제반 병참 시설을 북진 때 사용할 수 있게 됐다. 무엇보다도 인천상륙작전은 국군과 유엔군의 사기를 크게 높였고, 북한 인민군의 사기를 결정적으로 떨어뜨렸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것은 대한민국 해군첩보부대의 헌신적 역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1950년 8월 13일, 우리 해군은 17명으로 구성된 해군 특수첩보대를 선발한다. 함명수 소령이 첩보대의 대장이었으며, 대원들은 소위 엑스레이(X-ray) 작전이라 불리는 영흥도 첩보작전에 돌입한다. 영흥도에 상륙해서 인천의 적 병력, 보급, 기뢰부설 현황, 상륙지점의 지형과 암벽의 높이 등 상륙작전에 필요한 정보를 수집한다. 9월 14일 모든 임무를 무사히 마치고 대원들이 철수할 때 임병래 중위와 홍시욱 하사는 북한군에게 포위된다. 대대급 적의 공격을 받자 임병래 중위는 부하들을 먼저 후퇴시키고 자신과 홍시욱 두 대원은 유인 역할을 한다. 마침내 포위망이 좁혀 오자 두 사람은 작전의 기밀 유지를 위해 권총으로 자결한다. 1950년 4월, 해군사관후보생(OCS) 9기로 임관한 임 중위는 2013년 유도탄 고속함(PKG) 10번 함으로 부활, 유도탄 고속함 11번인 홍시욱함과 함께 우리 바다를 지키고 있다.

필자는 인천상륙작전에서 미 극동군 사령부 소속의 켈로(KLO)부대원으로 팔미도 등대에 점등했던 최규봉 지대장, 연정 해군 소령, 클라크 미 해군 대위, 클락혼 미 육군 소령, 포스터 미 육군 중위, 그리고 계인주 육군 대령의 노고도 언급하고자 한다. 이들 6인의 한미 첩보원의 노력과 획득한 정보가 인천상륙작전 성공에 크게 기여했다. 두 첩보작전의 성공은 현재 한미 동맹의 근원으로 그 토대를 구축했다고 할 수 있다. 한미 동맹 70주년과 인천상륙작전 73주년의 의미를 되새기며, 자칫 잊힐 뻔한 첩보부대원들의 노고를 되새기는 것은 유의미한 일이다. 목숨 걸고 적지에서 임무를 수행한 첩보부대원들의 헌신을 높이 선양하고 기리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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