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우 가천대 석좌교수

이기우 가천대 석좌교수
이기우 가천대 석좌교수

초기 사무관 시절, 나는 정말 열심히 일했다. 교육부 총무과 서무계장직을 마치고 보통교육국 교육행정과 사무관이 되면서 일하는 재미가 남달랐다. 보통교육국은 대학교육국과 함께 교육부 내 2대 핵심 부서여서 일에 힘이 실렸다. 그리고 열정을 다한 만큼 인정도 받았다.

그 때 모셨던 박병용 국장(뒤에 관리관으로 서울시부교육감, 차관급인 국립교육평가원장을 지냄)은 강한 추진력으로 상사는 물론 부하 직원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그야말로 카리스마가 대단한 분이었다. 한 번 안을 만들면 장관을 직접 설득해서라도 반드시 관철시키는 카리스마를 발휘했다. 당연히 무슨 일을 하든 믿고 따랐고, 열심히 보좌한 만큼, 아니 그 이상의 일하는 보람을 부하 직원들에게 안겨 주었다.

이 분의 성품을 알 수 있는 일화가 하나 있다. 박병용 국장이 대학정책실 국장 시절, 장관을 모시고 광주를 방문할 때였다. 전북을 거쳐 광주로 가는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가 나고 말았다. 장관은 다치지 않았는데, 수행차를 탔던 박병용 국장과 동승한 서울신문 정세용 기자(뒤에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내일신문 편집국장과 주필을 지냄)가 크게 다쳤다.

기자는 일주일 후 결혼할 예비 신랑이었다. 구급차에 실려 전남대병원 응급실에 도착했을 때, 병원의 사정이 좋지 않았다. 수술 장비와 인력의 한계로 한 명씩 수술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박병용 국장은 고통 속에서도 젊은 기자에게 양보하고, 자신은 다음으로 수술 받겠다고 했다. 기자는 수술을 무사히 끝내고 회복할 수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때 박병용 국장이 더 많이 다쳐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그 때 수술을 집도했던 노성만 교수는 뒤에 전남대병원 원장이 됐다. 한번은 내가 전남지역 교육기관 방문을 위해 광주에 갔을 때 노성만 전남대병원장(뒤에는 전남대총장을 지냄)과 박병용 국장을 모시고 점심을 먹은 일이 있었다. 그 때 옆에서 들은 이야기는, 당시 박 국장의 상처 부위를 열어 보니 뼈가 하도 많이 부서져서 도저히 수술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할 수 없이 뼈를 이리저리 얽은 채로 봉합할 수밖에 없었는데, 천만다행으로 그게 제대로 자리를 잡아 붙었다. 박 국장의 사례는 학계에서도 예외적인 경우로 연구 대상이라고들 했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들을 때도 박병용 국장은 웃기만 했다. 그렇게 대단한 분이었다.

박병용 국장은 유독 나를 신임하고 좋아했다. 그러던 와중에 나는 능력을 인정받아 사무관(5급)에서 서기관(4급)으로 승진했고, 부산 한국해양대학교 서무과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서무과장으로 근무한 지 6개월 정도 지난 어느 날, 교육부 유근하 총무과장이 나를 불렀다.

“박병용 국장님한테 연락이 왔는데 이 과장을 의무교육과장으로 데려가게 해달라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해?” “네?” 나는 뜻밖의 제안에 놀랍고 기뻤지만, 분명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과장님, 절대 안 됩니다! 안 된다고 해 주십시오!” 총무과장은 놀라는 눈치였다. 내가 당연히 수락할 줄 알았던 것이다. “정말? 그럼 곤란한데…….”

장관의 신임을 받는 잘나가는 국장이 멀리 있는 나를 데려가겠다니 당연히 감사한 일이다.  아니,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교육부의 과장은 서기관 급에서도 영광된 자리이고, 또 열심히 하면 승진 기회가 따르는 자리다. 공무원이라면 누구나 환호할 일이다. 서기관 승진 6개월 만에 다시 본부로 영전하는 파격적 대우다. 그만큼 나의 능력을 인정한다는 말이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그런 기회를 덥석 받을 수는 없었다.  

나는 부산에서 서울로 박병용 국장을 찾아갔다. 국장은 반갑게 나를 맞아 주었다. 당연히 자신의 제안에 기쁘게 응답하리라 기대하셨다. 하지만 나는 “국장님, 제가 앞으로 공무원 생활 하라고 하시는 겁니까, 아니면 말라고 하시는 겁니까?” 국장은 의아한 표정이었다. “저를 의무교육과장으로 보내달라고 하셨다면서요?” “그래, 맞아. 내가 함께 일하려고 이 과장을 요청했지. 이 과장만큼 일 잘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네, 국장님. 그 부분은 정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나는 진지하게 말했다. “교육부 과장 되는 게 하늘의 별따기잖습니까. 제가 앞으로 공무원으로 살아갈 날이 까마득한데, 서기관 승진 6개월 만에 다시 교육부 과장으로 영전해 돌아오는 겁니다. 그러면, 저보다 먼저 승진해서 교육부를 떠나 시도교육청과 대학에서 근무하고 있는 선배 스물두 분이 저를 어떻게 보겠습니까? 그 분들과 제가 적대 관계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나는 간절히 말씀을 드렸다. “저 좀 살려 주십시오. 선배들을 제치고 제가 앞서가면 아무리 일을 잘한들 누가 저를 곱게 보겠습니까?” 

그렇게 설득하면서 나는 당시 서울시교육청에 근무하던 송세화 선배를 대신 추천했고 그 선배가 결국 의무교육과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일을 무사히 끝내고 한국해양대학교로 돌아와 교육부 총무과장에게 그동안의 상황을 보고했다. 총무과장은 껄껄껄 웃으며 말했다. “이기우니까 국장님이 이야기 들어줬지 다른 사람은 어림없지. 어느 상사가 다른 사람을 추천하는 부하 직원의 청을 들어주겠나. 그만큼 이 과장을 신뢰한다는 말이지. 참, 살다가 영전하기 싫다는 사람도 보네. 하하하.”

그렇다. 일은 혼자서만 하는 것이 아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아프리카 속담도 있다. 일 잘하는 능력도 중요하지만 주변 사람들과 인화도 매우 중요한 덕목이다. 그것은 공무원 사회만이 아니라, 모든 조직에서 중요한 진리다. 열심히 일하면서도 늘 겸손한 자세로 다른 사람들의 입장도 배려하는 일이 ‘영전·승진’보다 더 소중한 가치라고 나는 생각한다. 농촌운동가 전우익 선생이 쓴 책 제목이 떠오른다.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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