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상기 한국전문대학교육협의회 진학지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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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에게 가스라이팅(gaslighting) 당했어요. 그것도 아주 강하게. 어릴 때부터 그랬어요.”

필자가 A양에게서 들은 말이다. A양은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필자와 상담했다. 두 번의 대학 실패를 경험했기에, 이번에는 아주 신중하게 대학을 선택했다. 학생부종합전형으로 갈 수 있는 대학을 골랐고, 가장 가고 싶은 대학을 골랐다. 물론 어머니와 상의해서 결정한 것이고, A양과 어머니 모두 만족한 결정이었다.

그런데 다음 날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지원하는 대학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아이와 협의를 마쳤고 아이도 매우 가고 싶던 대학이었다고 했다. 어제 지원 대학을 결정할 때 A양이 아주 만족했기에 어머니의 말이 조금 이상하게 들렸다. 최종 점검을 위해 A양에게 전화하면서 어머니가 새로운 대학에 지원하기로 했다는 사실을 말했다. A양은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고 했다. 어머니가 혼자 결정한 것이고, 어머니가 너무 가고 싶었던 대학이라고 했다.

A양은 어릴 때부터 어머니가 그렇게 해왔다고 했다. 자신의 의견이나 생각은 중요하지 않았고 어머니의 생각과 판단만이 중요했다. A양이 한 일은, 어머니가 만든 감옥에서 문제를 풀고 정답을 확인하는 것밖에 없었다. 공부가 재미없고 즐겁지 않았단다. 고3이 되어 대학에 지원할 때도 어머니가 원하는 곳만 지원했다. 그렇지 않으면 큰일이 날 것처럼 자신을 압박했다고 했다. 재수할 때도 어머니의 의견대로 기숙학원에 던져졌다. 자신은 혼자 공부하고 싶었는데 말이다. A양에게 그곳은 지옥 같았고, 1년 동안 허송세월을 보냈다. 이러한 모든 것이 어머니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남들의 시선과 결과만이 중요했다.

A양이 20세가 넘은 현재에도 어머니는 변하지 않았다. A양은 어머니의 요구대로 움직여야 하는 사람으로 한정될 뿐이다. 이미 너무 오랫동안 자신의 의견이나 생각이 무시당하며 자랐기 때문에 대학 선택도 그런 연장선에서 이해한단다. 필자가 A양에게 자신이 지원하고 싶은 대학을 주장해보라고 했더니,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이라 하면서 포기한다고 했다. 어머니는 어떤 수단을 쓰든지 당신의 요구를 관철할 것이고, 자신에게는 상처만 남을 거라는 것이다. 그런 어머니를 상대로 괜한 에너지를 쓰고 싶지 않단다. 이제까지 그랬기에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단념의 말을 하는데 표정과 목소리가 너무 슬펐다.

필자는 A양의 그런 상태가, 성장한 후에 겪어야 하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나타나지 않을까 걱정됐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는 학교에서 공부하는 선택과 대학을 지원하는 선택과 다른 차원의 문제다. 사회에서의 생존과 직결되는 부분이라 치열하게 자기의 주장을 해야 할 경우도 많다. 자기 생각과 결정을 주장하는 능력이 중요하다. 그런데 자신이 가장 믿는 어머니에게서 여지없이 거절당한 경험만 있으니 앞으로 힘들게 극복해야 할 것이다.

A양이 어머니와 함께 지내든지, 멀리 떨어져 지내든지 거리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언제든지 자신은 조종당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저 결정과 실행, 상명하복(上命下服)의 주종(主從)문화만이 있었다. 자신의 의견과 결정이 어머니에게서 받아들여지면서, 서로의 의견을 말하는 기회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아마 A양은 지금처럼 힘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더 당당하고 더 행복했을 것이다. 그러나 A양은 성장하면서 누군가에게 따스한 말을 듣고, 격려를 받지 못했다고 했다. 상담하는 필자가 그런 말을 하는 첫 사람이라고 했다.

자녀는 부모로부터 한 개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존재감을 존중받으며 성장할 기회를 제공받아야 한다. 자녀의 의견을 수용하든 거절하든 대화의 공간을 공유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성장하면 A양처럼 슬픈 청년기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자녀를 잘 되게 하고자 하는 부모의 마음과 사회를 보는 인식도 이해가 된다. 그러나 자녀 인생의 성장 과정에서 자녀를 배제한 결정이, 자녀에게 힘과 행복감을 끌어낼 수 있을까? 단연코 없다.

사랑하는 부모의 결정과 요구가, 그 어느 곳에서의 압박과 어려움보다 더 큰 좌절을 주어, 자녀를 움츠러들게 하고 포기하게 만든다. 그래서 A양은 어머니로부터 가스라이팅(gaslighting)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상담자로부터 받는 위로와 격려를 부모에게서 받을 수 있어야 한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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