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현 한양여대 문예창작과 겸임교수

박세현 한양여대 문예창작과 겸임교수
박세현 한양여대 문예창작과 겸임교수

예술사에서 많은 미학자와 예술가는 사물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재단하고 추구하는 데 온몸과 온정신을 다 쏟아 부었다. 이 아름다움의 대척점에 추함이 존재했기에 아름다움은 더 부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반대로 추함이 존재하기에 아름다움이 존재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결국 미(美)와 추(醜)는 동전의 양면처럼 평생 동거동락해야 하는 존재다. 사물의 미를 추구하고 지향했던 르네상스 시대에 추의 미학을 표현하려고 애썼던 예술가들도 있었다. 다빈치도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다.

사진=박세현 겸임교수
사진=박세현 겸임교수

추의 미학은 그로테스크라는 형식으로 설명된다. 그로테스크는 르네상스 시대였던 15~16세기 이탈리아어 ‘그로타동굴(grotta)’에서 유래한 ‘그로테스카(La grottesca)’와 ‘그로테스코(grottesco)’에 기원을 두고 있다. 동굴 벽면에 그림을 그리면 울퉁불퉁한 동굴벽의 특성상 그림이 일그러지고 찌그러져 보이는 것에서 나온 것이다.

이 용어는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의 장식미술로 이어져 적용되었는데, 이 장식미술에는 기괴하고 요상하게 생긴 사람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특히 영웅의 비극과 신화 이야기를 들려주는 대중 공연이 많았던 그리스 로마 시대에 민중들이 즐겼던 연극 ‘미무스(mimus)’가 있었다. 연극 미무스는 시장이나 개인의 저택에서 연출됐던 구연, 곡예, 촌극, 광대극, 익살극이었다. 이 극에서 배우들이 다양한 가면을 썼는데, 이 가면의 모습은 우스꽝스럽고 기괴하게 비틀어져 있었다. 이 미무스 가면이 캐리커처의 그로테스크 미학의 서막을 열었다.

사진=박세현 겸임교수
사진=박세현 겸임교수

5세기부터 시작된 중세시대는 종교개혁이 일어난 15세기까지, 거의 1000년이라는 기나긴 종교제국 시기였다. 가톨릭과 교회를 중심으로 발전했던 중세 미학에서 화려한 장식과 하늘에 맞닿고자 하는 고딕 첨탑의 교회 건축과 빛(신) 그리고 어둠(악마)을 대변하는 스테인드글라스는 신의 신성함을 상징했다. 그럼에도 신성한 교회 건축의 외벽과 기둥에는 추악한 악마상과 기괴한 동물상이 새겨지고 조각됐다. 선과 악, 미와 추의 의미를 조명한 프랑스 낭만주의 소설가 빅토르 위고의 《노트르담 드 파리》(1831)를 개작한 디즈니 애니메이션 <노트르담의 꼽추>에는 기형 외모를 가진 콰지모도가 괴물 악마상과 이야기를 하는 코믹한 장면이 나온다.

이 괴물과 악마상 들은 추잡한 원숭이, 광폭한 사자, 흉측한 반인반수, 날뛰는 마귀들 등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어떤 고딕 성당에서는 심지어 설교단에서 기도하는 동물로 성직자를 묘사하기도 했으며, 악마들의 국부를 핥는 여성이 부조되기도 했다. 이런 무시무시한 괴물과 동물, 그로테스크한 악마상, 외설적인 부조들에 대해 교회 성직자들은 신자들의 눈을 즐겁게만 해준다고 통렬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신성해야 할 신의 성전인 교회에 건축가들이 악마상과 괴물상 들을 조각한 이유는 무엇일까? 먼저, 이런 표현은 종교적 기득권 세력이면서 오히려 더 부패하고 고집스런 성직자들에 대한 야유며 패러디였다. 다음으로 교회 밖(악마)의 세계와 다른 교회 안(신성함) 공간의 대비를 통해 선과 악의 종교적 상징주의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었다. 신의 나라와 인간의 나라는 이렇게 중세교회에서 공존했으며, 교회는 중세시대의 그로테스크 판타지를 만들어냈다.

사진=박세현 겸임교수
사진=박세현 겸임교수

중세시대에서 그로테스크한 중세 환상주의를 가장 잘 보여주는 만화 같은 그림(캐리커처의 시작)은 죽음을 다룬 ‘춤추는 죽음 혹은 죽음의 춤’ 시리즈다. 이 춤추는 죽음은 당시 중세 유럽을 황폐화시켰던 ‘검은 죽음 즉 페스트’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났다. 페스트는 죽음이라는 공포와 함께, 죽음은 왕, 귀족, 평민, 노예, 부자 등 누구에게나 닥칠 보편적인 숙명이며 만민평등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결국 죽음은 신의 메시지이면서 처단자를 암시했다.

‘춤추는 죽음’은 앞으로 다가올 재앙을 경고할 목적으로 마임이나 연극, 그리고 교회에서 설교를 위한 시청각 교구로 자주 이용됐다. 결국 ‘춤추는 죽음’은 소름끼치는 종교적 묵시록이면서 사회에 대한 비판과 냉소적 유머를 담고 있었다. 그래서 춤추는 죽음은 종교적 교리를 전달하면서 철학적 존재론에 대한 물음이기도 했다. 중세 시대에서 ‘춤추는 죽음’을 소재로 판화를 제작하고 루터파의 종교개혁을 위해 선전도구로 사용한 화가가 한스 홀바인이다.

한스 홀바인(Hans Holbein, 1497~1543)은 1497년 독일의 무역도시 아우그스부르크에서 태어났다. 미술가 집안의 풍요로운 예술적 환경 덕분에, 한스 홀바인은 일찍 북유럽과 이탈리아 화가들에게 매료됐다. 그러다 대중의 미신과 사제들의 무지함, 교황과 고위 성직자들의 세속성을 비판했던 에라스무스의 자유계몽사상에 빠지면서, 1524년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신봉자가 됐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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