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규택 계명문화대 교수

조규택 계명문화대 교수
조규택 계명문화대 교수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1542년~1607년)은 임진왜란 국난을 극복한 명재상이자 충무공 이순신을 천거한 선견지명의 인물이다. 그는 1542년(중종 37) 10월에 경상도 의성현 사촌 마을의 외가에서 아버지 류중영(柳仲郢)과 어머니 안동 김씨 사이에서 둘째로 태어났다. 1558년 17세 때 세종대왕의 아들 광평대군의 5세손 이경의 딸과 혼인했다. 형은 류운룡(1539년~1601년)으로 철저히 종손으로 소임을 다했으며, 퇴계의 문하생으로서 학식과 인품이 높았다. 부친인 류중영은 1540년에 문과에 급제한 후 의주 목사·황해도 관찰사·예조참의를 두루 거친 강직한 관료였다.

1562년 가을, 21세의 류성룡은 형 운룡과 함께 퇴계 이황의 문하로 들어가 학업에 매진했다. 퇴계는 이들 형제의 학문적 자질에 대한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운룡은 당시의 선비들이 학문이 채 영글기도 전에 과거시험을 보고 벼슬길에 나가는 세태를 한탄하고, 과거시험보다는 학문에만 전념했다.

류성룡을 본 스승 퇴계는 그가 하늘이 내린 인재이며 장차 큰 학자가 될 것임을 직감했다고 한다. 또한 스펀지처럼 학문을 빨아들이는 그를 보고 “마치 빠른 수레가 길에 나선 듯하니 매우 가상하다”라고 찬탄했다. 퇴계 이황의 또 다른 제자로 류성룡과 동문수학한 학봉(鶴峰) 김성일은 “내가 퇴계선생 밑에 오래 있었으나 한 번도 제자들을 칭찬하시는 것을 본 적이 없는데, 그대만이 이런 칭송을 받았다”고 놀라워했다.

과거에 뜻이 없었던 형과 달리 류성룡은 1564년 23세에 소과인 생원과 진사시에, 1566년 25세에 대망의 문과에 급제해 비교적 순조롭게 벼슬길에 나아갔다. 28세에는 성균관 전적에서 행정의 중심인 공조 좌랑으로 파격적인 승진을 했다. 그의 탄탄대로와 같은 벼슬 생활에는 타고난 자질과 함께 가문의 배경, 그리고 퇴계의 뛰어난 제자였다는 사실도 무시할 수 없었다. 30세 때는 병조 좌랑에, 그리고 이조 좌랑을 거치는 등 출세 가도를 달리던 그는 1573년 부친상을 당하며 3년간 시묘 살이를 했다. 3년 상을 마친 1576년 류성룡은 사간원 헌납이란 직책으로 다시 벼슬길에 올랐다.

외교관 자격으로 명나라에 갔을 때 그의 학문적 역량을 본 중국의 선비들이 ‘서애선생(西厓先生)’이라 높여 부르며 존경을 표시했다. 귀국한 뒤에는 이 사실이 알려져 더욱 존경과 총애를 받는 인물로 성장했다. 그는 30여 년에 걸친 관직 생활에서 승문원 권지부정자라는 첫 벼슬을 시작으로 1580년에 부제학에 올랐다. 1593년에는 영의정에 오르는 등 그야말로 내외의 요직을 거쳤다. 류성룡은 50세에 이르러 좌의정이 되었고 이조판서를 겸임했다. 그러나 당론의 소용돌이 속에서 류성룡은 더 이상 벼슬에 대한 미련이 없었다. 여러 차례 사직상소를 올렸으나 왕은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정철의 처벌 문제를 두고 동인들은 내분에 휩싸여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뉘게 되었는데, 이때 류성룡은 온건파의 우두머리였다.

류성룡은 선견지명의 인재 등용과 자주적 국방으로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을 슬기롭게 헤쳐 나간 명재상이었다. 그러나 20대에 출사(出仕)해 최고 관직까지 오른 탓에 비교적 평탄했던 삶을 살았던 것으로 오해하기 쉬운 인물이기도 하다. 최고의 자리에 오른 만큼 벼슬에 있을 때나 물러났을 때나 비난에서 벗어나기 힘들었고, 업적 또한 평가절하당한 면이 많다. 그는 영의정에서 물러나자 고향인 안동으로 내려와 ≪징비록≫을 작성한다. 그의 ≪징비록≫은 임진왜란 전체 윤곽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우리를 성찰하게 한 역사서이자 문학서다. ‘징비(懲毖)’는 과거를 징계하여 미래를 조심한다는 뜻이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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