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진한 계명대 광고홍보학전공 교수

류진한 계명대 광고홍보학전공 교수
류진한 계명대 광고홍보학전공 교수

몇 해 전, 아티스트 나훈아는 ‘아홉 이야기’라는 앨범의 수록곡인 ‘테스 형’을 발표해 대한민국을 들었다 놓았다. 가사의 내용이나 가수의 퍼포먼스가 훌륭했을 뿐 아니라 우리에게 익숙한 철학가 ‘소크라테스’를 트로트에 소환함으로써 신선한 충격을 줬다. 가사 내용 가운데 아직도 기억에 남는 부분은 “아! 테스 형, 세상이 왜 이래?” “소크라테스 형! 사랑은 또 왜 이래?”라고 울부짖는 부분이다.

그런데 노래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들여다보면 맥(脈)이 ‘소크라테스 철학(Socraticism)’과 사뭇 거리가 있다. 우리는 “너 자신을 알라(Know yourself)”를 소크라테스의 가장 대표적 명언으로 기억한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무지(無知)를 깨닫는 엄격한 철학적 반성’에 중요한 가치를 뒀다. 인간에게 자기 자신을 아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거꾸로 요즘 사람들이 가장 쉽게 하는 일이 남을 탓하고 충고하는 일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난 누구?” “여긴 어디?”라는 한탄 섞인 유머 안에도 ‘자기 자신의 위치를 아는 것의 중요함’을 강조하는 풍자적 지혜가 있다.

대한민국에는 330개가 넘는 대학들이 있다고 한다. 2023년 전국의 대학정원(전문대 포함)이 51만 8884명이다. 수능 응시생은 50만 4588명이고, 재수생 등을 제외한 고3 수능 응시생의 숫자는 32만 6000명이다. 수치만으로 보면 매년 채워야 하는 신규 정원의 62%에 해당하는 신규고객이 배출되는 셈이다. 기업에서 생산하는 제품이라면 생산량을 줄여 수요와 공급의 균형을 맞추겠지만 대학은 그렇지 않다. 물론 일반적인 시장에서도 공급이 넘쳐나고 경쟁이 심해지는 카테고리를 종종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 산업이 ‘커피 산업’이다. 그런데 이 많은 커피숍 브랜드는 저마다 자기만의 ‘충성고객’을 가지고 있다. 가격이 저렴해 찾기도 하고, 소파가 편하거나 매장에 흐르는 음악이 좋아 찾기도 하고, 단순히 거리가 가깝거나 교통이 편리해서 찾기도 한다. 물론 가장 일반적이고 중요한 이유는 원두의 질(quality)이 뛰어나고 커피의 맛이 좋아서 일 것이다. 일반적 기업이나 제품의 브랜딩 작업과 대학의 문제는 환경의 차이가 있지만 보통 이런 경우 가장 명확하고 파워풀한 솔루션을 제공하는 전략이 『마케팅 불변의 법칙』의 저자인 잭 트라우트(Jack Trout)와 알 리스(Al Ries)가 개발한 ‘포지셔닝(positioning)’이다.

포지셔닝(positioning)의 출발점은 ‘제품(product)’이고, 가장 중요한 것은 ‘고객의 인식’ 속에 자기 자신을 차별화하는 방법을 찾는 일이다. 포지셔닝은 ‘자기 브랜드(brand, product or service)’와 ‘고객의 니즈(needs)’를 아는 것에서 출발한다. 물론 해당 비즈니스 카테고리에서 유일한 제품을 생산하고 있거나 제품 경쟁력과 소비자 인식에서 압도적인 선두 브랜드라면 큰 문제가 없겠지만 대부분 후발 브랜드들은 자신만의 차별화된 포지션으로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역사적으로 포지셔닝을 가장 전략적으로 활용한 광고 캠페인으로 미국의 렌터카 브랜드인 ‘에이비스(Avis)’와 탄산음료 브랜드인 ‘세븐업(7-up)’의 사례가 있다.

에이비스는 당시 미국의 렌터카 시장에서 ‘허츠(Hertz)’라는 선두 기업에 이은 2위 브랜드다. 그러나 순위만 2위일 뿐, 선두인 허츠와는 시장 점유율에서 엄청난 차이가 나는 후발 브랜드에 불과했다. 이런 경우 대부분의 마케팅 전략은 유명무실한 경우가 많다. 에이비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던 중 새롭게 광고 캠페인을 전담하게 된 에이전시에서 “우리는 2등에 불과합니다(Avis is only No. 2 in rent a car)”라는 카피를 필두로 하는 그 유명한 ‘No. 2 Campaign’을 제작해 집행한다. 캠페인의 내용을 보면 에이비스가 렌터카 시장에서 2위라는 사실을 단순히 알리는 데 그친 것이 아니라, 2위이기 때문에 1위 브랜드보다 더 열심히 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고객 관점에서 매우 강력하고 설득력 있게 전달했다. 물론 당시 렌터카 시장을 뒤흔드는 캠페인 효과를 거뒀다.

세븐업은 무색의 탄산음료다. 세븐업이 시장에 출시될 무렵은 이미 ‘코카콜라(Coke)’라는 브랜드가 탄산의 대명사로 압도적 위치를 차지하던 상황이었다. 세븐업이 아무리 ‘기존의 콜라를 대체할 제품’임을 알리려 해도 소비자들의 마음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 시점에 파격적인 관점의 커뮤니케이션이 만들어졌다. 그것은 “우리는 절대 콜라가 아닙니다”라는 일명 ‘언-콜라(Un-Cola) 캠페인’이다. 즉, 소비자들의 마음속에 탄산의 시장을 ‘콜라’와 ‘언-콜라’ 시장으로 구분하고, 세븐업을 탄산음료의 대명사로 군림하던 ‘코크(Coke)’나 ‘펩시(Pepsi)’의 ‘강력한 대안’으로 등극시키는 전략이다. 캠페인은 대성공을 거두었고 캠페인 첫해 탄산 시장의 15%를 장악했다. ‘세븐업’은 우리가 다 아는 ‘말보로’ 브랜드를 가진 ‘필립모리스(Philip Morris International)’의 제품이다. 말보로 역시 카우보이를 상징하는 이미지로 ‘세상에서 가장 야성적인 남자들의 담배’로 포지셔닝에 성공한 브랜드다.

필자가 근무하는 대구·경북 지역에는 유독 병원들이 많은 것 같다. 지역을 대표하는 대형 대학병원들이 있고, 안과나 치과처럼 특정 진료를 전문으로 하는 대형 병원들도 많다. 고령 인구가 많은 특성이 반영된 것인지 정형외과나 한의원과 같은 병·의원들도 유독 눈에 많이 들어온다. 흥미로운 것은 이 많은 병원 가운데에도 증상과 질병에 따라 환자들 머릿속에 가고자 하는 병원이 대부분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소문, 경험 아니면 의도적인 광고에 의해서든 예비 고객의 인식에는 ‘이 병에는 이 병원’이라는 대표성을 지닌 병원들이 지역마다 존재한다. 이것이 ‘포지셔닝의 힘’이다. 포지셔닝은 전략적이고, 차별적이고, 유동적이고, 소비자 관점에서 이뤄져야 한다. 포지셔닝은 제품의 속성이나 사용자, 제품의 용도나 사용상황에서 찾을 수 있다. 심지어 경쟁사나 경쟁제품에서 힌트를 얻기도 한다. 그리고 새로운 범주나 새로운 의제를 설정해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위치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즉, 선두 브랜드뿐 아니라 많은 팔로우 브랜드도 전략적이고 차별적인 전략을 찾는다면 충분한 수요와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

대학은 이미 많아졌고, 학령인구는 줄어들고 있다. 이것을 일반적인 시장으로 비유하면 제품을 생산하기 위한 공장들은 이미 많아졌는데, 그 제품을 사용하는 소비자의 규모는 줄어드는 상황이다. 아쉬운 것은 위기를 극복하려는 대학들의 방향과 방법이 천편일률(千篇一律)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문제나 위기의 원인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증상을 감추거나 없애는 일에 치중하는 것 같아 걱정스럽고 아쉽다. 지속적인 편두통에 시달려 온 환자에게 진통제를 처방하는 것은 ‘빠른 치료’인가? ‘바른 치료’인가? 패스트푸드 같은 단기적인 처방 말고, 기성복 같은 똑같은 출구 말고, 각 대학의 특성과 장점을 살리고, 지역의 상황과 환경을 고려한 차별화되고 경쟁력 있는 ‘빛나는 출구전략’을 찾으려는 안목과 의지가 절실하다. 근본적 원인은 출산율 저하에서 비롯된 학령인구 감소에 있지만, 작금의 대학 위기를 출산율과 학령인구에 돌리기에는 겸연쩍지 않은가? ‘교육백년지대계(敎育百年之大計)’라는 말을 이미 교육계 스스로 사문화(死文化)시킨 것인가?

세계는 지금 80억이 넘는 인류와 경쟁하고 있다. 똑같은 기준으로 운영되는, 똑같은 대학에서 교육을 받은, 똑같은 능력을 지닌 인재들을 양산하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상상해보라. 단순히 치아를 닦아주는 기능 외에는 특장점이 없는 ‘일반 치약’으로 사용되다가 양치하는 인구가 줄어서 안 팔린다고 걱정하는 일과 무엇이 다른가? 위기일수록 ‘노멀한 치약’보다는 ‘스페셜 치약’을 생산할 생각을 해야 한다. ‘똑같은 대학’이 아닌 ‘남다른 대학’만이 살길이다. 대학은 ‘자율’과 ‘창의’를 본질로 하는 가치 있고 안목 있는 교육기관으로 다시 세워져야 한다. 이것이 대한민국 대학이 균형을 가지고 생존하고 성장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균형은 ‘다 똑같은 구성의 통합’이 아니라, ‘대체 불가한 구성의 조합’이다.

“세상이 왜 이래?” “사랑은 또 왜 이래?”라고 탓하고 한탄할 때가 아니다. 대학은 번호표 뽑아 줄 서서 들어가는 맛집도 아니고, 수도권에서 가깝다고 지하철에서 가깝다고 가치가 매겨지는 아파트도 아니다. 진짜 맛집은 블로그에 소개되지 않아도 지하철역 코앞이 아니어도 알아서 찾아가고 손님이 바글바글하다. 대기업이 좋은 회사도 아니고 월급 많이 준다고 다니기 싫은 회사를 억지로 다니는 시대도 아니다. 대학이 위기라면, 그 위기의 탈출구는 남들이 가지지 못한 자신만의 매력과 경쟁력에서 찾는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 모든 대학이 가는 길 말고, 우리 대학만 갈 수 있는 길이 어디인지 고민하길 바란다. 대학은 장사 되면 문 열고 장사 안되면 문 닫는 회사나 가게가 아니었으면 한다.

2024년 새해는 식어 가는 대학 교육의 가치와 소중함, 애정이 다시 뜨겁게 끓어오르는 해가 되기를 꿈꾼다. ‘저마다의 맛’과 ‘저마다의 색’을 가진 미래의 생수가 이 대학 저 대학에서 콸콸 쏟아지는 ‘값진 해’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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