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상진 본지 논설위원·서강대 사회학과 교수

 
지금 ‘안철수’는 이미 설명이 필요 없는 정치 판세의 상수(常數)다. 그를 중요한 정치적 변수로 만든 요인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그의 ‘탈(脫)영웅적’ 리더십이다. 반대말은 영웅적 리더십인데, 그것은 이른바 영웅적 사회에서 유효하다. 개인보다 공동체가 우선하는 사회를 보통 영웅적 사회라 일컫는다. 영웅은 사사로운 이익을 따르지 않고 전체 공동체를 위해 노력한다. 영웅적 리더는 일반적으로 지도자나 교사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지도자는 따르는 무리들에게 어떤 목표와 비전을-경우에 따라서 강압적으로-제시하며, 교사는 목표와 비전을 실현하는 방법을-때에 따라 강제적으로-가르친다. 리더는 영웅이므로 따르는 무리보다 뛰어나다. 따라서 동의를 구할 필요가 없다. 대화에 심드렁한 것도 이래서 이해된다. 영웅적 리더는 지도자로서 교사로서 그들을 이끌거나 가르칠 뿐이다.

탈영웅적 사회는 공동체보다 개인이 우선하는 사회다. 이 사회에 어울리는 탈영웅적 리더는 상담자와 본보기에 가깝다. 상담자는 피상담자의 문제를 듣고 조언한다. 본보기는 가르치기보다 업적으로 자신을 증명한다. 새로운 유형의 리더는 자신을 따르는 무리와 구별되지 않기에, 그들 위에 군림하거나 앞에서 이끌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태도는 저항을 불러일으키거나 조롱될 뿐이다. 어차피 미래를 알 수 없으며 현재도 불안정하기 때문에 ‘영웅=선각자’ 자체가 불가능하다. 탈영웅적 리더나 그를 따르는 무리 모두 목표와 비전과 해결 방법을 모른다. 그래서 리더는 단지 그들의 문제를 경청하고, 같은 눈높이에서 조근조근 조언하거나 위로하고, 자신이 어떻게 문제를 해결했음을-참고로-보여줄 뿐이다.

안철수는 전형적인 탈영웅적 리더다. 그의 태도는 현 대통령의 그것과 큰 차이를 보인다. 영웅적-물론 많은 이들은 그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대통령은 목표와 비전을 제시하며 ‘나를 따르라’고 외치고 강압적으로 채근하지만 탈영웅적 시대의 개인들은 이에 저항하고 조롱한다.

둘째, 안철수는 성공한 기업가다. 이것이 대중의 지지를 끌어낼 수 있는 정치인의 중요한 특성임을 밝힌 개념이 바로 기업가적 민중주의(entrepreneurial populism)다. 그것은 기업가 출신의 정치인이 행하는 민중주의적 정치 전략이다. 여기서 민중주의는 ‘보통 사람이 느끼는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소외를 없애려는 노력’을 뜻한다.

미국의 정치 평론가 마이크 룩스는 그것을 ‘금융위기의 주범이면서도 돈 잔치를 벌이는 월스트리트의 거대 은행과 일자리를 아웃소싱하는 대기업과 결별하고, 일자리를 더 만들며 자영업자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전략’, 말하자면 보통 사람들이 살만한 환경을 만들려는 정치적 전략으로 정의한다. 안철수의 정치적 프로그램을 알 도리가 없지만, 그 얼개는 아마도 그런 모습일 것이다.

사실 기업가적 민중주의는 우리에게 지겹도록 친숙하다. 현 대통령도 그래서 당선됐다. 그렇지만 기성 체계에 대해 불신이 강하고 정치적 장이 부패했을 때 이런 혀낭이 발생한다. 유권자들이 특정 정치인을 지지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도덕성이나 신뢰성과 같은 인격적 측면, 다른 하나는 능력과 관련된다. 전자는 기성 정치인이, 후자는 기업가적 민중주의자가 주로 채용한다.

4년 전 많은 유권자들은 이명박 후보의 인격을 신뢰하지 않았지만, 기업가로서의 경력을 높이 샀다. 말하자면 다음의 고려가 작용했다. ‘어차피 정치인은 신뢰할 수도 없고 깨끗하지도 않다. 그렇다면 조금이라도 더 능력 있는 사람이 낫지 않을까.’ 물론 그 판단은 확실히 잘못된 것으로 증명되었다.

서로 경쟁하지 않기에 큰 의미는 없지만, 비슷한 기업가적 민중주의자이기에 두 사람을 비교해 볼 수 있다. 적어도 두 가지 점에서 젊은 민중주의자가 크게 앞선다. 탈영웅적이며 더 깨끗하다. 능력은? 아직은 알 수 없지만, 설마 더 못할 수는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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