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상진 본지 논설위원·서강대 사회학과 교수

학기말 시험이 한창이다. 학생들이 예년보다 더 조용하고 더 힘들어 보인다. 물론 시험 준비 때문일 터, 하지만 또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아마 원흉은 새벽에 중계되는 ‘유로 2012’가 아닐까. 잠을 줄여서라도 새벽의 스펙터클을 놓칠 수 없는 사람들이 비단 학생만은 아닐 것이다.

사실 스포츠는 큰 위안이다. 먹고사는 문제에 지쳐있는 우리들을 잠시라도 ‘구원’한다. 판에 박히고 답답한 일상생활의 고단함을 이겨내는 데 이보다 더 상쾌한 해소책은 없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스포츠 스타들에게 열광하며, 종종 그들을 영웅이라 생각한다.

스포츠 엘리트들이 영웅이라면 다른 사회 영역의 엘리트들도 그럴 수 있을까. 큰 부를 축적한 사람들은 어떨까. 이 땅에서 부를 축적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부모를 잘 만나거나, 권력과 결탁하는 것이다. 이들에게 영웅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영웅 서사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스포츠 선수들이 마치 그런 것처럼 각고의 노력을 통해 자신의 힘으로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여 정정당당하게 성공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경제적 엘리트가 영웅이 될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는 현대자본주의의 특성에서 비롯한다. 오늘날 최고경영자의 가장 주된 업무는 이윤창출이며, 그것은 ‘피비린내’나는 일이다. 일자리를 없애는 것만큼 이윤창출에 도움이 되는 것은 없다. 그래서 그들은 자격 미달이다.

정치 엘리트도 영웅이 되기 어렵다. 권력의 비즈니스가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오픈프라이머리와 같은 선출과정을 마치 스포츠 이벤트처럼 만들려는 노력도 있다. 그러나 모든 중요한 결정은 세인과 언론의 시선을 피해 은밀히 내려진다. 이에 비해 스포츠에서 중요한 결정은 대부분 공개되며 투명하다. 비록 선수나 트레이너 선발이 문제가 되기도 하지만 최종적인 결정은 언제나 공개된 곳에서 심판과 관중과 카메라 앞에서 이뤄진다.

스타 과학자(결국엔 사기꾼으로 밝혀진)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과학에서 영웅이 탄생하기는 힘들다. 한국에 영웅이 될 만큼 출중한, 예컨대 노벨상을 탈만한 과학자가 없기 때문이 아니다.

이유는 과학 자체에 있다. 과학은 일반인들이 이해할 수 없는 언어와 절차를 기본으로 하기에 어렵고 추상적이고 복잡하며 지루하다. 영웅은 성공과 성과를 그 자리에서 함께 나누며 열광하는 이들을 필요로 하는데 과학적 지식이 생성되는 지루한 과정을 카메라나 관객들에게 공개할 수 없다. 또 결정적인 순간을 함께 나눌 수 없으며, 일반인들의 이해 범위를 넘어서기에 열광의 정도가 제한적이다. 반면 스포츠의 언어와 절차는 공개적이며 쉽고 구체적이며 단순하다. 관객들은 영웅이 탄생하는 결정적인 순간을 함께 체험한다.

이렇듯 오늘날의 영웅은 스포츠 세계에서만 가능하다. 그리고 곧 있을 올림픽에서 한국 국적을 지닌 옛 영웅들과 새로운 영웅들을 기쁜 마음으로 만나게 될 것이다. 당연히 우리는 영웅들을 자랑스러워할 것이지만, 그들의 선배 영웅들이 남겨준 교훈을 함께 되새겨야 할 것이다. 영웅이 드물어진 오늘날, 그들은 신뢰와 주목(注目)의 보증수표이기에, 막대한 교환가치를 지닌다. 온갖 곳에서 이들을 초빙하려 애를 쓸 것이며, 이를 발판으로 스포츠 영웅들은 사회 각계에서, 예를 들어 광고 모델, 교수, 교사(교생 포함), 국회의원으로 활약한다.

많은 것들을 얻겠지만 두 가지 이유로 영웅성을 잃을 수도 있다. 첫째, 다른 세계, 특히 전문성을 필요로 하는 세계(교수, 교사, 국회의원)에서 필요한 수련 과정을 생략하기에 정당성의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둘째, 다른 세계의 논리를 따를 수밖에 없기에 영웅적 미덕이 손상될 수 있다.

영웅이 드물어진 오늘날, 그것이 되기도 힘들겠지만 그것으로 남기는 더 힘들어 보인다.

저작권자 © 한국대학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