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형 본지 논설위원·성신여대 IT학부 교수

“교차로 꼬리 물기를 하지 맙시다.” “가족계획, 이제는 출산입니다.” 이외에도 셀 수 없이 많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표어들이다.

우리 사회에는 캠페인이 넘쳐 난다. 고루과문 탓인지 몰라도, 필자는 우리나라와 국가발달 수준이 비슷하거나 민주주의 시장경제 국가들 중에서 이렇게 청유형 구호가 난무하는 곳을 알지 못한다. 이렇게 말을 하면 혹자는 그런 것이 뭐가 문제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심지어 차가운 법규를 들이대기 보다는 따뜻하게(?) 호소하는 공동체의식이 우리 사회에 남아 있어서라고 미화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구호와 표어가 난무하는 사회는 전근대적인 곳이며 전혀 바람직하지 않다. 캠페인이란 긍정적인 면보다 부정적인 효과가 훨씬 더 크다는 말이다. 이것이 왜 그런지 설명할 수 있는 좋은 틀이 바로 ‘공유물의 비극(The Tragedy of the Commons)’이라는 개념이다. 이 개념은 이미 여러 대학의 논술시험의 주제로 제시된 바도 있으므로 고등학생들도 많이 알고 있으리라. 그러나 머리로만 알고 실천되지 않으면 그게 무슨 소용일까.

‘공유물의 비극’은 일찍이 1968년 사이언스지에 실린 개릿 하딘(Garrett Hardin)의 동명의 논문을 통해 제시되었다. 이후 경제학, 사회학, 생태학 등 여러 분야에서 인용되며 중요한 개념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아주 간단히 요약하면 “개인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합리적 행위의 총합이 사회 전체적인 차원에서도 항상 합리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애덤 스미스(Adam Smith)가 국부론에서 제시한 ‘보이지 않는 손’으로 대표되는 자유주의에 대한 반례이기도 하다.

간단하게 글의 서두에서 나열한 표어의 예를 가지고 설명해 보자. 교차로 꼬리 물기는 교통정체를 일으키는 주된 요인 중 하나다. 운전자라면 거의 예외 없이 한번쯤은 그 피해자로서 또 가해자로서의 경험이 있을 것이다. 단속이 없는 상황에서, 꼬리 물기를 삼가자는 표어에 공감하여 그것을 지키기로 다짐하고 실천하는 ‘착한’ 운전자가 있다고 하자. 한편 그런 표어에 콧방귀를 뀌며 무시하는 ‘나쁜’ 운전자도 있을 것이다. 이럴 경우 극심한 정체를 빚는 교차로에서 ‘착한’ 운전자는 어쩌면 영원히(!) 교차로를 통과하지 못할 수도 있다. 꼬리 물기를 삼가서 진입하지 않고 기다리는 그의 앞에 계속 새치기를 하여 꼬리를 무는 자동차가 생길 터이기 때문이다.

급속히 고령화 사회로 치닫고 있는 우리나라는 머지않은 장래에 젊은이 두 명이 노인 한 명을 부양해야 한다고 한다. 이런 문제점을 인식하고 출산율을 높이자는 캠페인에 공감하여 늦둥이를 본 ‘착한’ 부부는 부실한 육아지원과 약육강식의 정글 같은 교육환경에서 그 늦둥이를 양육하느라 자신들의 노후준비는 전혀 못하고 비참한 만년을 보낼 수 있다.

하딘의 표현을 빌자면 이렇게 하여 “양심은 스스로를 제거한다.” 곧 좋은 취지의 캠페인에 반응하는 ‘착한’ 운전자와 부부가 도태되는 것이다. 주변에서 이런 경우를 본 다른 합리적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할까? 당연히 교차로에서는 무조건 꼬리 물기를 하고, 한정된 자원을 자식 하나에게만 투입하여 경쟁력을 높이거나 아이를 낳지 않을 것이다. 그 결과는? 교통은 완전히 마비되고 출산율은 계속 떨어져 공멸한다. ‘공유물의 비극’이다.

해결책은 명백하다. 교차로에서는 경찰이나 CCTV를 이용하여 강력한 단속을 하고, 출산을 한 부부가 그 결정이 잘했다고 생각할 수 있도록 양육 환경을 개선하는 것이다. 법령정비와 예산배정 등의 실천이 필요한 것이다.

이런데도 과연 입으로만 하는 캠페인의 해악이 가볍다고 할 수 있을까? 이것은 문제의 본질을 가리고 잠재적으로 양심을 도태시키는 행위이다.

<한국대학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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