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과학상을향해뛰자]②선진국형 연구풍토 조성

[한국대학신문 김기중 기자] “연구자가 끈기 있게 연구할 수 있도록 대학이나 정부, 기관 등에서 적절한 연구 환경을 조성해줘야 한다. 정부는 기초과학 연구를 옹호하는 입장에 서서 재원을 마련하고 연구자를 격려해야 한다.”(1998년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 루이스 이그내로 미국 UCLA 교수)

지난해 4월 한양대 백남학술정보관에서 열린 ‘톡!톡! 과학콘서트’에 참석한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 루이스 이그내로 UCLA 교수는 ‘자유로운 연구풍토’를 강조했다. 이그내로 교수는 “정부가 재원을 마련하되 연구자가 무엇이든 마음대로 연구할 수 있는 자유를 줘야 한다”며 “국가가 어떤 방향을 잡아서 이끄는 것은 기초과학 분야에서 절대 생산적인 결과를 낼 수 없다”고 말했다. 우리나라는 표면적인 지표로는 세계적 수준이지만, 과학분야 노벨상 수상자는 단 한 명도 없다. 이에 대한 중요한 요인 중 하나로 ‘연구 풍토’를 꼽는 이가 적잖다.

대학은 미국, 연구소는 독일= 노벨과학상 수상국들 중 미국은 압도적 1위를 달리고 있다. 이어 영국과 독일이 2위와 3위를 다투는 형국이다.(표 참조) 아시아에서는 유일하게 일본이 15위 안에 들었다. 이들 노벨과학상 수상 기관을 분석하면, 대학은 미국, 연구소는 독일이 강세를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국가별 노벨과학상 수상 순위.(괄호( )는 2012년 수상)

미국은 시카고대 출신 노벨과학상 수상자가 1위로, 87명이나 노벨상을 받았다. 2위는 컬럼비아대로 82명, 3위는 MIT로 77명이다. 4위는 하버드대, 5위는 UC 버클리대다. 미국의 대학 중 ‘노벨상 왕국’이라 불리는 시카고대는 지난 1890년 설립 이후 크게 주목받지 하다가 1929년 로버트 허친스 총장이 취임하며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특히, 교양교육 일환으로 각 분야 고전 100권을 무조건 읽도록 한 프로그램은 시카고대의 경쟁력을 크게 높였다는 평가다.

주목할 만한 것은 이곳의 연구 풍토다. 노벨상 수상자가 수차례 나왔던 시카고대 페르미연구소는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는 게 전통이다. 시카고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페르미연구소에서 연구했던 조용민 건국대 석학교수는 “누구도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고, 무엇도 알려주지 않았다”고 했다. 연구자는 연구소에 들어가 연구를 하고 그 결과를 논문으로 냈고, 누구도 간섭하지 않는다. 다만 “평가할 때에는 철저하게 평가한다”는 게 조 석학교수의 설명이다.

■ 노벨상 산실 '막스플랑크연구소'= 최근 30년 동안 대학이 아닌 단일 기관으로 노벨상을 배출한 곳으로는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 미국 국립보건원·벨연구소, 스위스 CERN 등을 꼽을 수 있다.

미국 국립보건원은 생리의학, 벨연구소와 CERN은 물리학 분야에 특화된 연구소다. 이에 반해 막스 플랑크 연구소는 물리·화학·생리의학 분야 등 다양한 분야에서 수상자를 배출했다. 막스플랑크 연구소가 ‘노벨상의 산실’이라는 명칭을 얻은 이유다.

미국·영국 대학이 명문 대학들로 유명한 것에 반해, 독일의 대학은 서열 없이 평등화가 돼 있다. 각종 공공연구기관은 연구분야에서 대학을 보완한다. 기초연구를 주로 담당하며, 응용연구 분야에서 대학과 산업계 간 연계 구실을 하고 있다.

이들 공공연구소 중 대표적인 곳이 바로 막스플랑크 연구소다. 막스플랑크 연구소는 △이미 정착된 분야가 아니거나 여러 분야가 접목되는 연구분야로, 해당 분야의 연구를 대학에서 수행하지 않거나 대학에서 하기에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분야 △특수한 거대 설비가 필요하거나 막대한 자원이 필요해 대학에서 수행하기 어려운 연구 분야를 주로 연구한다.

▲ 막스플랑크 연구원들.(사진제공=막스플랑크 연구소 홈페이지)

산업계와 정부로부터 독립적이며, 특히 연구의 무한 자유를 보장받는 것도 큰 특징이다. 다만, 연구결과에 대해서는 지속적인 평가를 하고, 평가 결과에 따라 인사 및 연구주제에 대한 결정을 내린다. 이런 방식으로 연구의 장점을 강화하고, 장기적으로는 연구의 우수성을 유지하고 있다.

■ 기초과학연, 막스플랑크 될까= 자율성은 연구의 기본이자 가장 중요한 요소로 꼽힌다. 우수한 연구결과를 얻기 위해선 창의성이 전제돼야 하는데, 이 창의성은 자율성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른바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에서 적용하는 ‘하르낙 원리’다.

지난 2011년 출범한 기초과학연구원(원장 오세정)은 독일의 막스플랑크 연구소를 그대로 본 따 만들어졌다. 지난 2012년 모두 50명 중 16명의 연구단장을 선정했으며, 연간 100억원에 육박하는 파격적인 연구비를 지원키로 했다.
연구자가 마음껏 연구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을 만들기 위해 연구단장 선정과 연구소 운영 방식에 막스플랑크연구소의 시스템을 도입했다. 특히 연구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보장하기 위해 지금까지의 연구과제 지원·평가 틀을 깼다. ‘논문 수’ ‘특허 수’라는 정량적 지표 대신 정성적 평가체계를 도입했다.

송충한 기초과학연구원 정책기획본부장은 “그동안 평가는 한 마디로 ‘논문 몇 편 썼느냐’였다. 그래서 이제까지는 논문을 200편 낸 사람이 20편 낸 사람보다 더 우대받았다”며 “연구단장 선정은 이틀에 걸쳐 정성적인 평가를 했고, 외국인 평가자가 절반을 넘도록 했다. 평가자들은 자신의 명예가 걸려 있어 함부로 단장을 뽑지 않았다”고 말했다.

연구의 연속성 보장을 위해 최소 10년간 연구지원을 보장해 주는 원칙을 세웠다. 이후에도 3년마다 평가를 통해 연장할 수 있다. 연구에만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는 뜻이다. 오세정 기초과학연구원장은 “학연이나 지연에 얽매이지 않고 우수한 연구단장을 뽑을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정성적인 평가제도를 도입한 것은 지금의 연구 선정 풍토와는 비교할 때 혁신적인 일”이라고 설명했다.


“관치주의가 연구 망쳐” 원로 물리학자 쓴소리
[인터뷰]조용민 건국대 석학교수

“지금과 같은 정책으로 노벨상은 어림도 없다.”

입자물리학 이론과 우주론 분야 최고의 석학, ‘통일장 이론’으로 유명한 한국 원로 물리학자인 조용민 건국대 석학교수(사진)의 쓴소리다. 그가 말한 ‘지금과 같은 정책’이란 ‘관치주의’다. 노벨상을 다수 배출한 시카고대의 페르미 연구소, 독일의 막스플랑크연구소, 유럽 핵 공동연구소 등을 거친 그는 연구를 망치는 관치주의에 대해 날선 비판을 날렸다.

“연구자들이 주말에 회의하면 연구비 정산이 안 된다. 밤에 모여 연구하면 위에서 ‘왜 밤에 모여 연구를 하느냐?’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감사를 통해 ‘연구비를 더 이상 줄 수 없다’고 한다. 이래서야 무슨 연구가 되겠나.”

그는 1965년 서울대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공군장교를 거쳐 1970년 미국 시카고대로 유학했다. 시카고대의 경우 미국 하버드대와 양대 산맥을 이루는 대표적인 연구대학이다. 그는 당시 시카고대에 대해 “자유로운 연구풍토에 대해 상당히 놀랐다”고 말했다.

“우선은 수업 수준이 월등해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이어 페르미 연구소에 들어갔는데 그곳의 연구 풍토는 더 충격적이었다. 누구도 연구에 대해 간섭하는 이가 없었다. 연구는 스스로 하는 게 전통이었고, 자발적인 연구에서 창조적인 아이디어가 나오곤 했다.”

1970년 당시 과학의 태동기를 맞았던 한국은 이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성장했다. 경제개발계획에 맞춰 과학을 육성해야 했고, 그러자면 성과가 필요했다. 과학을 모르는 공무원이 인사권과 돈줄을 잡고 흔드는 풍토가 50년 동안 이어졌다.

“미국이나 독일의 연구원들은 정해진 직장생활이 없다. 더 나은 곳에 가고 더 나은 대우를 받고자 스스로 연구에 몰입한다. 다만, 이에 대한 평가는 전문가 그룹이 혹독하게 한다. 우리나라는 어떤가. 1년 예산 1000억 넘는 연구소가 몇 개나 되는데 도대체 거기서 하는 게 뭐냐. 연구원들이 감투만 생각하는 거 같다. 연구자는 연구만 해야 하는데 ‘난 연구소장 언제 되나’ 이런 마음뿐이다. 연구가 제대로 될 리 없다.”

그는 “한국이 노벨상을 타려면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했다. 단기적으로는 일본과 같은 막대한 예산 투자, 그리고 장기적으로 관치주의를 걷어낸 자유로운 연구풍토 조성이다.

“일본 유명 연구소 중 KEK(고에너지연구소)가 있다. 30년 동안 막대한 투자를 통해 지난 3년 전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과학계에서는 ‘돈으로 노벨상을 탔다’고 한다. 이런 방식으로 한다면 한국도 10년 안에 노벨상 수상자가 나올 수 있다. 다만, 장기적으로는 페르미연구소나 막스플랑크연구소처럼 연구자가 연구에 몰두할 수 있게 해 주는 연구 풍토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노벨상은 받기 어려울 것이다.”

주요 국가들의 기초과학 연구 및 육성정책

대학서 기초과학 연구하는 미국, 연구기관 비중 높은 독일

지난 2005년 독일의 여론조사기관 TNS Emnid가 200명의 과학자를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96%가 미국을 세계에서 주도적인 과학강국으로 꼽았다. 이어 독일이 82%, 일본과 영국이 각 각66%, 프랑스 58%였다. 이들 선진국 들은 어떻게 기초과학을 육성할까.

■ 미국 : 미국은 주로 대학에서 기초과 학을 연구한다. 미국 공립대학(주립 대학 등)은 주로 학생 수 기준으로 주 정부의 자금을 지원받지만 연구자금의 대부분은 연방정부로부터 받고 있다. 의대와 의학센터와 같은 전문기관들이 중요한 기초과학연구를 맡고 있다. 이밖에 국공립연구소를 통해 임무수행에 필요한 기초과학 연구를 수행하기도 한다. 국공립연구소의 경우 몇 개의 연방부처들(국방성, 에너지성, 보건성, 보훈처 등 포함)이 개별적 연방출연연구개발센터(FFRDCs)를 운영하며, 대학이나 민간기업과 같은 외부기관과 계약된 연구실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 독일 : 기초과학 연구 인프라 가운데 특히 대학 외 공공연구기관의 비중과 역할이 상대적으로 매우 높다. 실제로 독일의 대표적인 기초과학 연구기관 중의 하나인 막스플랑크연구협회(MPG)는 각 분야에서 세계를 주도하고 있다. 1990년대 중반부터 국가혁신체제 강화 와 국가연구시스템의 현대화를 목표로 대학과 공공연구기관의 개혁을 강력히 추진했으며, 우수대학육성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다. 한편 공공연구기관에 대해서는 연구혁신협약을 체결해 시행 중이다.

■ 영국 : 영국의 대학과 기타 공공연구 기관에 대한 R&D 자금지원의 흐름은 크게 세 가지다. 영국의 공공부문 연구시스템에는 크게 대학, 부처소속 공공연구기관, 연구회 산하 연구기관의 세 가지 연 구수행기관들이 있다. 대학은 교육과 연구(주로 기초연구)를 담당하고 있고, 정부부처 소속 공공연구기관은 해당정부부처가 자신의 임무를 달성하는데 필요한 연구서비스를 제공하며, 연구회 산하 연구기관(RCIs: Research Council Institutes)은 각 연구회의 임무와 연관 된 연구 및 관련 서비스를 제공한다.

■ 일본 : 전통적으로 일본의 기초과학은 구 제국대학을 중심으로 한 주요대학 및 1917년에 설립된 이화학연구소에서의 이학연구를 통해 그 기반이 형성됐다. 1959년에 과학기술회의가 설립되면서 과학기술진흥의 기조가 형성됐고, 1981년 과학기술입국 표방에 이어 1986년에는 과학기술정책대강을 책정하고 1995년에는 과학기술기본법을 입법화해 5년 마다 과학기술기본계획을 책정하고 있다. 2000년대에는 과학기술진흥에 전략 개념이 도입됐다. 특히, 2001년~2005 년 제2기 과학기술기본계획에서는 중점 4분야(생명과학, 정보통신, 환경, 나노기술·재료)가 선정됐다.


 

‘경제발전’ 목표에 관치주의 자라나

즉각적 성장 위해 기초보다 응용으로

해방 이후 기초과학 투자는 경제발전에 밀려 등한시됐다. 즉각적인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바로 써먹을 수 있는’ 응용연구가 더 유용했기 때문이다. 우리 과학 발전의 역사는 짧다. 노벨상을 위한 기초과학의 역사는 더욱 짧다. 게다가 방향마저 ‘경제발전’에 맞춰져 있어서 문제 해결 방식(PBS) 연구가 주를 이뤘다.

■ 1960년대-태동기 : 1960년대는 우리나라가 농업중심 후진국에서 공업중심 경제발전을 위한 경제개발계획을 발표한 시기다. 수출주도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산업생산력 개선이 필요했다. 이에 따른 생산력 제고를 위한 기술의 중요성도 인식하기 시작했다. 독립부처인 과학기술처가 이 때 생겼다. 우리나라 최초로 정부출연연구개발기관으로서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도 개원했다. 정부의 예산규모는 한정됐다. 대학의 연구개발 및 실험실습을 위한 시설 및 기자재도 부족한 실정이었다.

■ 1970년대-기반기 : 연구개발 및 과학기술발전을 위한 국가적 토대를 보다 확실하게 갖추고자 노력한 시기다. 경제개발 목표 달성을 위한 기술분야별 출연연구 기관들이 설립되기 시작했다. KIST가 성공했고, 경제개발을 뒷받침하기 위한 출연연구기관의 역할 확대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됐다. 이에 따라 기계, 선박, 해양, 화학 등 전문분야별 출연연구기관들이 신설됐다. 특수 법인 형태의 이공계 전문대학원을 신설해 한국과학원이 출범했다. 1977년 한국과학재단이 출범, 대학의 연구활동을 국가발전목표에 부합하도록 유도했다.

■ 1980년대-성장초기 : 과학기술처 특정연구개발사업이 추진, ‘정부연구개발사업’이라는 정부의 강력한 연구개발지원수단이 동원됐다. 1970년대 급격히 증가한 정부출연연구기관들에 대한 통폐합이 진행됐다. 대학-산업계-정부출연(연)간의 역할 분담론도 제기됐다. 이 때부터 대학은 기초연구, 출연연구기관은 응용연구, 산업계 연구기관은 개발연구로 각각의 역할과 기능분담이 나눠졌다. 우수과학연구센터(SRC), 우수공학연구센터(ERC)사업이 시작되었고, 기초과학육성을 위한 목적기초연구사업이 신설됐다.

■ 1990년대-성장기 : 교육부와 과학기술부의 양대 지원체제가 확립됐다. 지원사업들이 보다 체계화된 시기다. 과학기술부, 산업자원부, 정보통신부 등 각 부처들이 경쟁적으로 정부연구개발사업을 추진, 정부연구개발사업이 크게 확대됐다. 1981년 설립된 학술진흥재단이 교육부의 기초연구예산확대로 본격적으로 활동, 기초과학연구 분야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됐다. 과학기술부는 목적지향적인 기초연구를 중심으로 지원하고, 교육인적자원부는 순수학술연구 및 단기기반연구를 중심으로 지원하도록 조정됐다.

■ 2000년대-도약기 : 2000년대 초반 ‘선도과학자 육성사업’ ‘지역대학우수과학자지원사업’ ‘여성과학자지원사업’ 등 새로운 목적지향 개인연구 지원 프로그램들이 등장했다. 집단연구 지원을 위한 사업으로 기초의과학연구센터(MRC, 2002년), 국가핵심기초연구센터(NCRC, 2003년), 지방연구중심대학(2004년) 등이 새롭게 신설됐다. 이명박 정부 들어 교육부와 과학기술부가 통합됐고, 노벨상 연구를 지원할 기초과학연구원이 출범했다. 박근혜 정부 출범과 함께 부처가 분리, 미래창조과학부가 출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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