草堂 金基運의 삶과 인생(13)우생순의 신화

▲ 초당약품 소속 국가대표 선수들과 고병훈 감독(사진 맨 오른쪽)은 서울올림픽 여자핸드볼에서 우승을 거두며 '우생순'의 신화를 이끌어냈다.

우연(偶然)이 필연(必然)을 만들다.

1980년 봄 설립한 백제여상의 신입생을 모집할 때 하루는 무안군수와 무안교육장이 나를 찾아왔다. 그들은 여자핸드볼에 관한 얘기를 꺼냈다.

“이사장님! 무안군 해제면에 여자핸드볼 팀이 있습니다요. 이 핸드볼 팀은 그동안 전국대회에서도 우승을 휩쓸었지라. 그런디 도내에 여자 핸드볼 팀을 갖고 있는 여고가 없어서 해제중학교의 우수한 선수들이 진학할 곳이 없는 딱한 형편인디요. 그러니 백제여상에 이 선수들을 고스란히 받아주셨으면 허는데... 어떻겄습니까?”

형식상 나의 의향을 묻는 것이지만 사실상 간청이나 다름이 없었다.

나는 처음에 난색을 표했다. “이제 막 신입생을 뽑는 신설 학교에서 운동팀을 창단한다는 것이 무리한 일입죠.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나는 핸드볼이 어떤 스포츠인 지도 잘 모르는디...”

그러나 그토록 뛰어난 고향의 핸드볼 선수 소녀들이 진학할 학교가 없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군청에서도 교육청에서도 “힘껏 도울 테니 이 딱한 핸드볼 선수들을 그대로 받아주시면 좋겄습니다요”라고 두 번, 세 번 간청을 해 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뜻밖에도 학교의 서무과장을 비롯한 몇몇 교직원들이 나서는 것이 아닌가.

“저희들이 사비(私費)를 털어서라도 선수들의 숙식비를 도울랑께요. 그랑께 이사장님께서는 아까운 어린 아이들의 장래를 열어주시면 고맙겄습니다요.”

나는 그 말에 그만 감동을 받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돈이야 얼마가 들더라도 무안군 해제중학교를 졸업하는 여자 핸드볼 선수 9명을 고스란히 신입생으로 받아들여 숙식제공 및 장학금 지급의 혜택을 베풀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백제여상이 개교와 동시에 1학년 선수만으로 여자 핸드볼팀을 창단하게 됐다. 우리나라 학교 체육사에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가난한 농촌출신의 이들 핸드볼 선수들은 1학년이었던 그해 전국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했고, 2학년이 된 그 다음 해부터는 전국대회를 휩쓸기 시작해 백제여상을 전국적으로 유명하게 만들었다. 그 다음 해부터는 해제중학교를 졸업하는 여자핸드볼 선수를 자동적으로 계속 받아들이게 됐다. 2회 입학생으로 백제여상에 들어왔던 김현미 양이 바로 1988년 세계 최우수 여자핸드볼 선수로 뽑힌 자랑스런 주인공이었다.

‘귀신은 염불(念佛)에 약하고, 사람은 인정(人情)에 약하다’는 말이 있다.

진학할 학교가 없어서 딱한 처지에 놓여있던 해제중학교 여자핸드볼 선수들을 ‘인정에 약해’ 특기생으로 받아들인 것이 인연이 되어 나는 핸드볼과 운명적인 관계를 맺게 됐다. 나중에는 이 핸드볼팀이 오히려 학교를 빛나게 해주었다.

이 인연은 내가 설립한 초당약품 핸드볼팀으로 이어져 ‘망외(望外)의 기쁨’을 나에게 안겨줬다. 백제여상 핸드볼팀 선수들이 1988년 올림픽대회에서 금메달을 따는데 견인차 역할을 하는 핵심 선수로 뽑혀서 초당약품을 일약 유명한 제약회사로 만들었다. 그러니 세상일이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고나 할까.
약업에 평생을 바친 나는 1982년 4월 16일 경기도 반월에 숙원사업으로 꿈꾸던 제약회사인 초당약품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하게 됐다.

이 무렵 다시 한번 핸드볼팀과의 인연을 맺게 된다. 아직 초당약품의 공장을 짓기도 전인 1984년 2월 22일 초당약품 핸드볼팀을 창단했던 것이다. 때마침 반월공장 기공식을 한 바로 그날이었다.

공장도 없는 제약회사, 제품도 아직 생산하지 않은 제약회사가 공장 착공일에 여자 핸드볼팀을 창단했다는 것은 아마도 우리나라에서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울 것이다.

당시 백제여상 여자핸드볼팀 선수들이 졸업하고도 갈 곳이 없었다. 여자핸드볼팀을 갖고 있는 단체나 회사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백제여상을 졸업한 우수한 선수들이 기량을 썩히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워 6명의 졸업생을 서울에 있는 한국체육대학에 진학의 길을 열어 주었다. 그런데 졸업식에 참석하기 위해 무안으로 내려온 학생들이 교장실로 달려 들어와 일제히 눈물을 글썽이는 것이 아닌가.

“이사장님! 저희가 한국체육대학에 들어가게 된 것은 정말로 고마운 일인디요. 근디 저희들은 모두 가난한 농민의 딸들이 아니겄어요? 체육특기자로 장학금을 받기는 하겄지만 먹는 것, 입는 것, 용돈 같은 것은 꿈도 못 꿀 형편이라서 서울생활을 도저히 할 수가 없구만요...”

다시는 체육대학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어린 여자선수들을 겨우겨우 달랬다.

“그렇다면 우리 학생들아! 체육대학으로 돌아가서 1년만 선수로 뛰어주면 그 뒤에는 내가 취직을 시켜주든지 자네들이 결혼할 때까지 책임을 지겄네...”

그때 체육대학에 학생들을 받아달라고 애원했던 나는 낭패였다. 사정사정해서 진학의 길을 열어주었던 것인데 이들이 체육대학에 돌아가지 않으면 대학의 입장도, 내 체면도 모두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먼저 약속을 한 다음 협의 끝에 체육대학으로부터 답변을 받아냈다.

“그럼, 체육대학 선수로 앞으로 1년만 뛰어주면 그 뒤에는 자유의사에 맡기겠습니다.”

그런 1년 후에 백제여상 출신 선수 가운데 1명은 학교에 남고, 나머지 5명은 “도저히 체육대학에 더 다닐 수 없다”고 또 다시 나를 찾아와 애원을 했다.

이제 막 여자핸드볼 팀으로 명성을 날리게 된 체육대학 측에서 1년 전의 양해를 무시한 채 이들 5명의 선수를 내주려 하지 않았다. 또 “만일 체육대학을 자퇴하면 선수자격을 박탈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나온 것이었다.

나는 중간에서 입장이 참으로 난처했다. 1년만 체육대학 선수로 뛰어주면 그 뒤에는 책임을 지겠다고 약속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각 끝에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초당약품에 핸드볼팀을 두기로 했다. 회사에선 당연히 반대가 잇따랐다.

“판매할 제품도 없고, 선전할 약품도 없는 초당약품에 실업팀을 둔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하고도 백해무익한 일입니다. 회장님!”

그러나 나는 어린 선수들과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는 오직 일념으로 반대를 물리치고 여자핸드볼팀을 지원했다.

그랬더니 이 팀이 연전연승(連戰連勝)하는 놀라운 결과를 가져왔다. 1년 후인 1985년 4월 제40회 종별 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했고, 1986년 2월에는 전국체전에서도 우승을 일궈냈다. 1987년 2월에는 대통령기대회에서 우승의 영광을 차지했다.

그리고 1988년 9월 역사적인 서울올림픽에서는 초당약품의 선수 5명과 고병훈 감독이 출전, 당당히 금메달을 획득했다. 한국 핸드볼 역사에서 초유의 괘거를 이룩한 것이다. 이들은 서울 올림픽에서 영광의 주인공이 되어, 국내외 매스컴의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았다.

나의 사랑을 받고 실력을 키울 수 있었던 비인기 종목의 시골 소녀들은 마침내 은혜에 보답했다. 당시를 회고하는 언론인들은 “백제여상에 다니던 어린 소녀들이 주축을 이룬 여자핸드볼 국가대표팀이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내는 쾌거를 이룬 것은 이른바 언론이 ‘우생순(여자핸드볼팀의 국제대회 선전을 다룬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의 제목) 신화’라고 부르는 한국 여자핸드볼 역사의 자랑스런 뿌리를 심은 것”이라고 평가했다.

1989년에 들어와서도 2월에 제12회 핸드볼연맹 회장기에서, 3월에는 제6회 대통령기 대회에서 각각 우승하는 등 모든 핸드볼대회에서 우승을 휩쓰는 영예를 누리게 됐다.

전국 어디를 가나 ‘초당약품’하면 ‘핸드볼’이요, ‘핸드볼’하면 ‘초당약품’을 손꼽을 만큼 유명하게 됐다. 초당약품이 여자핸드볼팀의 덕을 톡톡히 보게 된 것이다.

‘나이어린 여자선수들과의 약속 한가지를 지키기 위해서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뻔히 손해를 볼 줄 알면서도 창단했던 핸드볼팀. 그런데 결과적으로 초당약품을 크게 발전시키는데 원동력이 되어 준 셈이다. 아하! 그러니 세상 일이란 참으로 오묘한 것이야...’

나는 이 여자핸드볼과의 인연을 통해서 세상 일이란 ‘흉(凶)이 복(福)이 되는 수가 있고, 복이 흉이 되는 수가 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됐다.

그래서 옛 사람들이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하면서, “순간순간의 일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말고, 어떤 상황에서도 차분하고 담담하게 미래를 향해 살아가라”고 한 것이 아니었겠는가.

우연이 가져다준 필연적인 결과-. 백제여상의 ‘꿈을 넘은 꿈’이 무명의 시골 처녀들을 세계적인 스포츠 스타로 만들고, 올림픽 금메달이라는 값진 수확을 낳은 것이다.

<정리=정종석 한국대학신문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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