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생각] 반세기를 거슬러 돌아온 대학의 품
[사람과생각] 반세기를 거슬러 돌아온 대학의 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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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순에 한국외대 영문학 석사학위 받은 권노갑 민주당 고문

[한국대학신문 이재 기자] “박사학위 도전이 쉽지 않다고들 하지만 3년 안에 딸겁니다. 86세에 박사를 따는 게 목표에요. 링컨 연구에 1년, 케네디와 링컨의 비교연구에 1년, 논문 쓰는데 1년이면 충분하지 않겠어요?” 

팔순이 넘은 ‘DJ의 그림자’ 권노갑 민주당 상임고문(83세, 사진)의 박사학위 출사표다. 올해 여든 셋의 원로가 정계도 아닌 학계로 돌아왔다. 교수도 아닌 학생이다.

▲ 권노갑 민주당 상임고문이 지난 5월 27일 한국외대 영문학 최고령 석사학위자가 됐다. 지난 6월 2일 박사과정 신청을 마친 그는 3년 내 박사학위 취득을 자신했다.

권 고문은 지난 2009년 한국외대 석사과정(영문학과)에 입학해 5월 27일 ‘존 F. 케네디의 연설문에 나타난 정치사상연구’로 이 대학 최고령 영문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6월 2일 박사과정 등록도 마쳤다. 박사과정의 주제는 링컨이다. 평소 존경하던 인물을 연구해 박사학위를 꼭 취득하겠다는 의지가 20대 못지 않다.

만학(晩學)도 어지간한 만학이 아니다. 권 고문은 이미 60년 전인 1953년 동국대 경제학과를 졸업해 학사학위를 받았고 반세기동안 정계를 누비면서 명예박사학위도 받았다. 그런 그가 새삼스레 대학에 문을 두드린 이유는 뭘까.

“영어에 관심이 남달랐어요. 목포상업고등학교를 다녔을 때가 일제 강점기였는데 영어를 유독 잘했어요. 1~2학년 때부터 만점을 받았죠. 이후 눈길을 돌려 경제학을 전공했지만 영어를 손에서 놓진 않았습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 하나. 정계에서 권 고문은 오랫동안 ‘영어통’으로 통했다. 그의 영어실력은 故김대중 전 대통령을 보필하던 시절 여러 차례 빛을 발했다. 1973년 발생한 ‘김대중 납치사건’도 그가 나서 해결했다. 권 고문은 사건 발생 후 미국, 일본대사관 등을 방문해 김 전 대통령의 생환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밖에 언론통제로 검열당한 외신을 김 전 대통령에게 전달한 것도 그다.

“국제통신사 지부에서 보도관제를 뚫고 뉴스를 모았지요. 그것을 김 전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논의했습니다. 당시 동교동계에서 영어 좀 쓸 줄 아는 사람이 저밖에 없었어요.”

그러나 숨 막히게 돌아가는 정계에서 책을 읽고 영어를 공부할 시간여유는 없었다. 그가 다시 영어책을 접한 것은 옥중에서다. 2004년 ‘현대비자금’ 사건에 연루돼 시작된 옥살이에서 그는 대학졸업으로부터 반세기가 흐른 뒤 다시 영어책을 손에 잡게 된다. 

“옥중에서 링컨부터 루스벨트, 클린턴, 오바마등 미국 대통령들의 회고록과 위인전을 즐겨 읽었습니다. 영어문장을 해석하고 공부하는 희열을 오랫만에 맛봤죠.” 

옥중의 ‘희열’에 중독된 그는 출감 후 영문학 박사학위와 동시통역사 자격을 취득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당시 권 고문의 나이는 78세. 팔순을 코앞에 두고서다. 평생지기인 김 전 대통령과 약속도 했다.

“꿈을 꼭 성취하라고 많은 격려를 해줬어요. 그것이 김 전 대통령과의 마지막 약속이 된 셈이죠.”

2009년 2월 권 고문은 꿈을 이루기 위해 미국 하와이대학으로 유학을 떠났지만  6개월만에 급히 귀국한다. 국내에 머물던 측근으로부터 김 전 대통령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접했기 떄문이다. 급히 달려간 응급실에서 마주한 김 전 대통령은 의식이 없었다고 한다. 

“김 전 대통령의 손을 맞잡고 약속을 꼭 지키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그길로 그는 한국외대에 진학했다. 60년을 돌아온 배움의 길인 셈이다.

▲ 2009년 정치적 동반자인 故김대중 전 대통령을 떠나보낸 권노갑 민주당 상임고문. 그는 김 전 대통령의 손을 맞잡고 오랜 학문의 뜻을 이루겠다는 다짐을 했다. © 최성욱

매스컴으로만 접했던 노 정치인의 등장에 학생들도 술렁였다. 몇몇 학생은 인증샷을 찍어갔다.

“저와 함께 공부한다는 것에 놀란 학생들이 있었죠. 그 소식을 부모에게 전했더니 믿지 못해 ‘인증샷을 보내라’고 했답니다. 많이 찍어줬어요.”

권 고문은 먼저 다가와준 학생들 덕에 만학도가 겪을 법한 외로움을 느끼지 못했다고 말한다. 오히려 도움을 받은 적도 있다.

“지난해 전립선암으로 한 달간 입원을 했었는데 동기들이 제가 결석한 동안의 수업을 녹음해 강의노트와 함께 전해주더란 말입니다. 덕분에 학기를 잘 마쳤습니다. 그 학생들에게 너무 고마웠습니다.”

이 일이 계기가 됐을까. 권 고문은 학생들과 식사도 자주했다. 근처 식당에서 청국장을 먹으며 영·미시와 셰익스피어에 대한 토론도 벌였다. 꽉 짜여진 수업 일정이 오히려 학생과 교류를 늘릴 기회가 됐다.

“마지막 학기는 화요일에만 수업이 있었어요. 12시부터 6시까지 수업이었는데 끝나면 저녁시간이라 함께 자주 식사도 했고 커피도 자주 마셨죠.”

영문학 수업에서 그를 괴롭힌 것은 ‘고어’다. 주어와 동사가 도치된 문장 해석이 힘들었다고 한다.

“수업을 통해 몰랐던 것들을 알게 되는 희열이 컸어요. 그게 공부의 맛 아닌가요. 이 나이를 살았어도 모르고 지나갔을 수도 있는데 공부를 하게 돼 참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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